2013년 5월 27일 월요일

으로 듣는 말씀

 
< 알기 쉬운 예정론(Predestination) 1 >
 
R.C 스프룰 지음 (생명의 말씀사) 20101105 (요약 전달: 박준호 목사)
 
*R.C Sproul :개혁주의 신학계를 이끌어가는 신학자, 심오한 진리를 알기쉽게 설명하는 글과 강의로 유명하다.
웨스터민스터 대학과 피츠버그 대학원, 화란의 자유대학교 공부. 리폼드 신학대학원 교수, 낙스 신학 변증학 교수.
 
 
1장 갈등
 
예정이라는 어휘 자체가 불길한 냄새를 풍긴다. 예정론이란 숙명론으로 이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태어나기도전에 모든 것이 다 결정되었다면 인간은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이라는 어쩌면 어렵게 여겨지고 기피하고 싶어하는 주제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정론은 성경에 명백하게 제시된 교리이기 때문이다. (1:4,5,11 ;8:29...)
예정론은 결코 칼빈이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다. 신학을 성경의 토대위에 세우고자 한다면 예정의 개념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실지로 모든 교회들은 어떤 형태로든 예정론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성경적인 입장에 서려면 예정의 교리를 가지느냐 버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될 뿐이다.
 
책상위의 문구 <너는 네가 성경에서 진리라고 말하기를 원하는 사실들이 아니라 성경에서 진리라고
말하는 사실을 믿고, 설교하고,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예정론을 지지하는 개혁주의적 입장의 학자들 : 어거스틴 , 토마스 아퀴나스,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프란시스 쉐이퍼, 로저 니콜, 제임스 보이스, 필립 휴즈...
*반대견해를 가진 학자들 :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필립 멜랑크톤, 요한 웨슬리, 찰스 피니, C.S루이 스, 노르만 가이슬러, 존 워익 몽고메리, 빌리 그래함.....
 
 
2장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
 
예정론이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늘나라나 지옥을 우리가 그곳에 도달하기 전 뿐만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정론은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 사실은 어떻게 이해하든 아주 냉혹한 말처럼 들린다. 적어도 불신자들에게 있어선 더욱 그렇다.
1. 하나님의 주권 :주권자로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최고의 권위이시다. 다른 모든 형태의 주권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용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권위(authority)라는 말에는 그 자체 안에 주인(author)이라는 말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주권을 행사하고 계시는 모든 것들에 주인이 되신다. 피조 세계 중에 단 하나라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용 없이 움직인다면 이미 하나님은 주권자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한다면 무신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악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주권과 악의 문제 : 거룩하신 하나님과 악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느냐? 이 문제를 회의론자들은 기독교의 아킬레스의 발꿈치(the Achilles'Heel of Christanity)"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무시하고 세상에 악이 들어왔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악조차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말인가? 여기서 많은 신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야기한다. 악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서 죄를 범하려는 최초의 성향을 얻었을까? 우리는 이 문제를 사탄에게로 돌린다. 사단에서 속아서 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단지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면 모든 죄는 사단의 것이다. 그러나 사단이 하나님의 말을 인용했을 때, 아담과 하와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결구 선악과를 먹은 것은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서이다.
타락하기 전 인간은 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죄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죄를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질문에 모두 답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우리가 아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악이 발생하도록 허용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결정을 악하다고 말할수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 악을 허용하신 사실도 선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용하신 그 악은 여전히 악한 것이다.
 
철학자들의 질문)하나님이 인간이 범죄 할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그것을 미리 막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도 않으시며, 주권자도 아니시다. 범죄를 허용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하나님이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타락한 피조물을 위하여 완전한 구원의 계획도 함께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택한 자의 구원을 예정하신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만약 타락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최종적 결정이 타락한 죄인들의 손에 맡겨져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모두 버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강요해서라도 다 구원받게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다면, 인간의 자유는 여지없이 침해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강제적인 능력을 거기에 사용하지 않으신다. 단지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택한 일부의 사람들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해선 여전히 모른다가 정직한 대답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구원받는 것이 공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다루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결정은 언제나 공의로우시다. 구원받은 사람은 긍휼을 얻은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행위에 대한 합당한 공의를 받은 것이다. (품꾼 이야기)
 
 
3장 예정과 자유의지
 
예정과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진다. 예정이란 어떤 힘에 의해 정해진 상태이고, 자유란 내가 결정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유의지란 <사전의 선입견이나 성향, 특정한 기질이 없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어떤 성향이나 특정한 기질 없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결정했다면, 그것은 그런 성향이나 동기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의지를 <선택하는 마음(the mind choosing)>으로 정의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욕망을 통해 결정된다. 이것이 인간타락의 초점이다.
어거스틴은 타락한 인간이라 해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거스틴은 타락전과 타락후의 인류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1)타락전 :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2)타락후 :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무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타락 후 인간은 죄없이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면 다시 죄를 범하지 않을 능력을 소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죄를 범할수 있는 능력도 제거되지는 않는다.
 
육신에 있는 자들과 육신에 있지 않은 자들을 구분해 주는 것은 성령의 내주이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수 없다(6:44)고 하셨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욕망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원죄란 최초의 죄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인 죄악된 상태이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범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예수님의 도우심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면에서 예정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교리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주 계속)
 
으로 듣는 말씀
 
 
                              < 알기 쉬운 예정론(Predestination) 2 >

R.C 스프룰 지음 (생명의 말씀사) 20101112 (요약 전달: 박준호 목사)
 
 
4 장 아담의 타락과 나의 타락
 
예정의 교리 속에 감추어진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우리의 죄악 된 성품을 어떻게 아담에게서 물려받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세운 적이 없다. 우리의 불평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담은 확실히 우리 모두를 대표한다.(5:12-19) 타락의 저주가 모든 인류에게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고, 그것을 허용하셨다. 타락은 일종의 사고가 아니다. 어쩌다가 죄의 구덩이로 미끄러진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두 발로 뛰어든 것이다. 타락을 예정하신 하나님은 또한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도 예정하셨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도 우리를 대표할 수 없다. 우리에게 타락이 없었던 것처럼 구원도 없다.
 
 
5 장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 거듭남과 신앙
 
칼빈의 5가지 원리 (TULIP) 1)Total Depravity(전적 타락) 2)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3)Limited Atonement(제한적 속죄) 4)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5)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
*중요한 예화 1.죽을병이 들어 고통당하는 사람(죄인) 몸은 전적으로 마비되어 있다.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 치료약을 주셔야만 회복할 수 있다. 혼수상태다. 하나님이 치료약을 만들어 주셔야 살 수 있다. 하나님이 99%의 일을 하신다. 하지만, 1%는 인간이 할 일이다. 그것은 그 치료약을 입을 벌려 먹는 일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2. 타락한 인간을 수영을 못해 물에 빠진 사람으로 비유된다. 두 번이나 물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다시 물 밑으로 들어가면 죽을 것이다. 유일한 소망은 구명대를 던져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선을 정확하게 그 사람의 손앞에 던지신다. 이제 그 사람이 구명대를 붙들면 살고, 거절하면 죽는다. 그것이 그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이다. 이 두 가지 예화가 보통 우리가 이해하는 자유의지와 구원의 상관관계일 것이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이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고 본다. 아직 입을 벌리고, 구명대를 잡을 정도의 기운이 남아있다. 타락성 가운데서도 미미하지만, 선을 행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견해는 인간은 완전히 죽었다고 선포한다. 그는 입을 벌릴 수도 없다. 구명대를 잡을 힘도 능력도 없다. 그는 이미 물에 가라앉아 죽었다. 이 죽은 사람을 하나님이 건지셔서 인공호흡을 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셨다.(거듭남, 중생)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회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되는 것이다. 오직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성품과 성향을 주시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6:37)
*칼빈주의에 대한 오해 :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선택하도록 강요하시는 반면 다른 사람들에겐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는 것을 칼빈주의로 오해한다.
하나님은 필사적으로 구원 받으려는 사람을 못 오시도록 막으신 적이 없으시다. 예정에 관한 중요한 핵심은 생래적 인간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원하는 마음을 심어주실 때에만 그리스도를 원하게 되며 갈망까지 가지게 된다.
그것을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표현한다.
 
 
6 장 예정은 이중적인가?
 
이중적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의 마음속에는 믿음을 일으키시고, 버린 자들의 마음속에는 불신앙을 심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혁주의적 견해가 아니다. 칼빈주의 견해는 선택의 작정은 적극적인 것이고, 유기의 작정은 소극적인 것이다. 이중적이라는 말은 그 근거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했다는 구절(7:2-5)과 롬 9장의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불신앙을 심어주실 필요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원래 사람의 마음은 강퍅하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 행사하고 있는 억제력을 제거하시면 된다. 하나님은 때로 구속적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타락한 인간들의 악한 의도와 사악한 성향들을 사용하신다.(바로, 가룟유다..) 택함받은 자들은 긍휼을 받는 것이고,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공의를 받는 것이다. 9:16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원한다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구절은 알미니우스주의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구절이다.
 
7 장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당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딤후4:6-8)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에 대한 내적 증거를 통해 고양된다.(8:1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확신을 가지게 된다.
A.A.Hodge는 참된 확신과 잘못된 확신 사이를 이렇게 구별했다.
참된 확신은 꾸밈없는 겸손을 가져온다. 거룩한 부지런함으로 인도한다. 정직한 자기 성찰로 인도하며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한 관계를 사모한다. 반면 거짓 확신은 영적 교만을 가져온다. 게으른 방종으로 인도한다. 정확한 평가를 회피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냉담하다.
그런데, 이 구원의 확신은 확대될 수도 있고, 위축될 수도 있다. 적어도 얼마동안 상실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다윗), 커다란 고통에 노출될 때() 구원의 확신은 위축된다.
1. 우리의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는가? 로마 카톨릭은 사실상 칭의의 은혜가 상실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치명적인 죄를 범할 때 영혼속에서 구원의 은혜가 파괴되는데, 고백성사를 통해 회복되지 않으면 멸망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신앙은 치명적인 죄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죄가 죽음을 가져오므로 모든 죄가 치명적이라고 믿는다.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을 풀이하면 당신이 은혜를 받았다면 결코 그것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며 은혜를 상실했다면 결코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존하신다. (1:6)(10:27-29)(8:33-39)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은 삼위일체의 사역이다.(17:11-12)
알미니우스의 견해는 아이의 안전은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이의 힘에 달려있다. 칼빈주의 견해는 아이의 안전은 그 손을 붙잡고 있는 아버지의 힘에 달려있다. 아이가 손을 놓으면 아버지가 다시 굳게 잡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를 믿다가 타락한 사람은 어떻게 설명이 될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도 심각하게 타락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전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다윗,베드로) 믿다가 타락한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며, 애당초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유다도 처음부터 멸망의 자식이었으며, 그의 회심은 가짜였다. 세 가지 범주의 사람들이 있다.
1)신자들 2)교회안의 불신자들 3)교회 밖의 불신자들 - 그러므로 고전9:27, 딤후2:17-18, 6:4-6 은 교회안의 불신자들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참된 신자가 아닌 것이다.
 
 
8 장 예정에 관한 질문과 반대
 
1.예정은 숙명론인가? 숙명론은 인간사의 많은 일들이 변덕스러운 신들(운명론)이나 비인격적인 우연의 힘에 의해 통제된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복잡한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해 우연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상 우연히 설명할 건 없다. 단지 인간의 무지를 표현할 뿐이다. 우리의 운명은 우연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이 질서정연한 우주가 우연에 의해 창조되었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2. 성경은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하지 않는가?(벧후 3:9구절에 대해)
만인구원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죄란 무엇인가? (12:31-32구절에 대해)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죄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저질러지는 죄가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실히 알면서도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죄는 마귀들과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죄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
4.예정은 전도의 사명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미리 결정되었다면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말이다. (10:13-15) 우리를 택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가 전도의 사명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의무이자 특권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목적을 미리 정한 것 같이 그 방편도 미리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데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그 일에 있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나 우리를 통한 전도는 외적 부르심이다. 내적으로 부르시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다.
 
결론 : 예정의 진리는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난다. 예정의 교리는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준다. 하나님께서 멸망의 길에 버려진 우리를 자신의 선하신 뜻대로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것이다. 오히려 구원의 결정이 변덕스런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음으로 안도하게 된다. 그래서 예정은 오직 찬양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11: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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