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Doctrine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Doctrine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5월 27일 월요일

개혁주의 신학이란? - R.C Sproul

한국어 번역본 http://jinzzabegi.tistory.com/46

원본 영상 http://www.ligonier.org/learn/series/what_is_reformed_theology/introduction-4/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전지하심

I. 서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인간이 스스로의 뜻에 따라 창조주의 뜻조차 거부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증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존중하시며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원하신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배치되는 개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로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하게 될 터이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인간이 어떻게 될 지는 그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므로, 하나님조차도 그의 미래를 알 수 없게 되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일어날 일을 이미 다 알고 계신가? 인간이 어떤 자유의지를 갖고 어떻게 행하든, 그가 어떻게 행할는지 알고 계시는가?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작정과 예정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어떻게 관계하는가?

 본 논문에서는 이에 대한 의문을 신학과 학부생의 입장으로서 풀어나가보려 한다. 우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개념과 한계를 명확히 하고(II장)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관련한 하나님의 예정(III장)에 대하여 서술한 후, 더불어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그분에게 있어서 시간의 개념(IV장)에 대하여도 논하려 한다. 그리고 결론에서 자유의지와 전지하심, 작정과 예정에 대하여 종합해보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II. 인간의 자유의지

 철학적인 면에서 자유의지는 결정론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인간 개개인이 조종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지배되고 희생당하며 모든 행동이 보이지 않는 어떤 인과법칙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결정론이라면, 자유의지는 행동이 그렇게 결정되지 않고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육체적 혹은 정신적 행동과정에서 둘 이상의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으며 또한 새로운 행동을 시작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의지의 힘을 구사하여 결정론적인 상황으로 보이는 환경을 개선-지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으로, 인간이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라는 개념이다1.

 이러한 견해를 신학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이 구원의 주체로서 나설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기에 따라 구원 여부가 결정되는데,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의 저술 <자유의지에 대하여 (Diatribe de livero arbitrio)>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인간이 그것에 의하여 자신을 영원한 구원에로나 또는 그 반대로 이끌 수 있는 것을 향하여 방향을 전환하는 힘”이다2.

 이와 같은 견해는 알미니우스주의 (Arminianism)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인간은 선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악을 떨침으로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3.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난점이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아담의 죄책으로부터 말미암아 나타난 원시적 오염 (Original Pollution)이다. 이것은 원시적 의가 박탈되고 죄에 대한 적극적 경향을 가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 오염은 전적 부패 (Total depravity)로 설명되며, 고유의 부패가 인간성의 모든 부분에 미쳐서 영적 선이 조금도 없으며 단지 도덕적 왜곡만 있음을 의미한다. 펠라기우스주의 (Pelagianism)와 소치니주의 (Socinianism), 그리고 초기 알미니우스주의에 의하여 부정되었으나 성경의 다음 항목에서 이를 가르친다4. (요 5:42; 롬 7:18, 23; 8:7; 고후 7:1; 엡 4:18; 딤후 3:2-4; 딛 1:15; 히 3:12)

 루터는 에라스무서에 반대하는 저술인 <노예의지에 대하여 (De servo arbitrio)>에서 인간에게는 그와 같은 자유의지는 없으며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면 오직 죄를 행할 자유만 있을 뿐이라고 답하였다. 또한 루터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한다. “선한 일들이 선한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악한 일들이 악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악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즉, 선한 공적이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자유로워진 사람이 그 삶의 결과로 선한 공적이나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5.

 개혁신학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오직 은혜 (Sola gratia)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사실로부터 근거한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모두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하였다6.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느냐, 아니면 자기의 통찰력의 지시에 따르느냐의 여부이다7.

 신학적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는 인간이 삶의 주체가 되어 선도 악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악을 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나 자율적으로 행동하려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느냐를 인간이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선악과를 따먹느냐 따먹지 않느냐, 하나님의 생명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지식으로 살아가려 하느냐-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느냐8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자유의지다.


III.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예정

 II장에서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의 측면에서 자유의지가 존재함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자유의지가 과연 하나님의 전지성과 충돌하지 않는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의 전지성에 대해, 뻘콥 (Louis Berkhof)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의 지식이란, 하나님께서 전혀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을 아시며, 따라서 가능한 그리고 현실적인 모든 것들을 아시는 완전성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 지식은 하나님 안에 고유하게 있는 것이요, 외부에서 섭취된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은 하나님의 의식에서 언제나 완전하며 명백하다. 그것은 총포괄적이기 때문에, 전지 (omniscience)라 불리워진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체를 아신다. 그는 모든 사물을, 과거, 현재, 미래를 걸쳐,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그대로 아시며, 또한 그것들을 그 참된 관계에서 아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감히 통찰할 수 없는 것들의 숨은 본질을 충분히 아신다. 현실적인 것도, 가능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음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은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의 전지를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왕상 8:39; 시 139:1-16; 사 46:10; 겔 11:5; 행 15:18; 요 21:17; 히 4:13. 9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지식을 완전하게 가지고 계시는데 이러한 지식은 자신의 영원한 계획의 시행과 관련되고,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전 포괄적이어서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적인 것까지도 모두 아신다10. 이 전지성으로 미루어볼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일어날 어떤 결과도 이미 알고 계심이 명백하다.

 또한 그 지식과 지혜로부터, 하나님께서는 그가 생각하셨던 목적을 달성키 위해 가장 좋은 수단을 선택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일체의 이차적인 목적으로 하여금 최종적인 목적에 공헌케 하시는데, 이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11.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하심으로 또한 이어진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미리 되어질 모든 것을 정하셨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할 모든 일들을 미리 정하시는 그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영원하신 목적이라 정의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12. 예정은 다음의 두 가지로 나뉘어 설명된다. 하나는 선택 (Election)이고 하나는 유기 (Reprobation)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창세 이전에 선택하시고 또한 구원받지 못할 자들은 그대로 유기하기로 결정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신 이유는 그분 자신의 결단 안에만 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롬 9:1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분을 믿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Sola gratia)에 의해서이며, 그것을 주시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창세 전부터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셨다면 인간에게 진정으로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을 유기하시고 있다고 답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치 않으시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 왕은 하나님의 능력을 모세로부터 열 번이나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 7:13)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전에 이미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출 4:21)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선했던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바꾸셨다고 보기보다는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놓아두셨다고 보는 편이 옳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의 마음에도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강퍅케 하시고 일부러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 아니하신다는 점은 명백하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13

 또한 이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전지함과 연결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하나님께서 예지하시기 때문에 예정하신다고 이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데, 펠라기우스주의 (Pelagianism) 혹은 반펠라기우스주의 (Semi-Pelagianism)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예정하셨기 때문에 예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지하셨기 때문에 예정하신다고 본다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구원받거나 혹은 구원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로 구원받기를 선택하거나 혹은 선택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예지하시므로 결과적으로 선택과 유기가 생기고 예정하심이 나타났다고 보는 시각이 생겨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주셔서 인간이 구원받았다고 보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구원을 선택할 수 있다 보게 된다14. 그러나 이미 II장에서 우리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스스로 구원을 선택할 능력조차도 없음을 확인하였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전지하심, 그리고 예정에 대해서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이 장차 타락할 것과 그를 통해서 그 후손이 멸망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그렇게 정해 놓으셨다.” 15 다만 이 예정론을 이해할 때 주의점은 칼뱅 (John Calvin)이 본디 이 예정론을 말한 것이 인본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신본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결과론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칼뱅에게 있어서, 인간의 이성이나 자유의지는 인간적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는 인 본위 신앙이므로 이를 철저히 배제하고 하나님의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철저한 신 본위 신앙을 주장한 것이다. 신자가 믿다가 타락하기까지는 선택된 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방법이 없고, 또 그가 탕아와 같이 다시금 주님께로 돌아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선택된 자의 규정을 정할 수 없고 신앙의 결과로서만 알 수 있다고 볼 때, 칼뱅의 조명론은 결과론에 근거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킨 남은 자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16. 중요한 것은 구원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며, 이 예정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용하며 하나님께서 그것들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시는 가운데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 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의 지식으로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음을 인정하여야 한다17. 칼빈은 예정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불가능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일들에 대하여 무지할 줄 아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 일들을 알려고 하는 열망은 일종의 광기다.” 18


IV. 하나님에게 있어서의 시간

 마지막으로 하나님에게 있어서의 시간과 전지성의 관계를 논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흘러가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심은 분명하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또한 하나님께서 장차 있을 일도 알고 계신다는 것도 분명한데19,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어떤 관련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논하기 전에 먼저 어거스틴 (Augustine)의 시간에 대한 관념을 언급하고자 한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아무것도 흘러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요, 만일 아무것도 흘러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며, 만일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시간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지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데 이 두가지 시간, 즉 과거와 미래가 어떻게 하여 있게 되는 것입니까? 반면에 현재라는 시간이 항상 현재로 남아 있어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현재가 -시간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과거로 지나가는 것으로만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현재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현재 시간의 존재 이유가 지나가 없어져 버리는 데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 지나가는 것으로만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20


 이러한 어거스틴의 통찰은 그 자체로 뛰어난 것이지만, 그보다 먼저, 시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사물의 변화는 창조를 지시하고 있다는 것과 모든 변화하는 것은 피조물이라는 것[246], 그리고 시간이란 변화와 함께 시작된 것이며 그것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는 것과[247], 따라서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란 없었다는 것을 말했다[248]. 그리고 그는 시간을 영원과의 대비 속에서 논의하고 있으며, 시간과 영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249]을 말한다21.

 영원이란 결코 비존재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도 미래도 없어야 한다. 비존재로 흘러가지 않는 참된 존재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고, 오직 현재만이 있는 그것을 어거스틴은 영원이라고 부른다. 이 점에서 영원은 무한한 시간적 지속이 아니라 시간을 넘어선 초시간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이시고 참된 존재이시다22.

 이와 같은 견지에서 생각해볼 때, 시간이 흘러감에 영향을 받는 것은 오로지 피조물뿐이다.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시간조차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신다. 그분에게 있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인간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분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현재 일어나는 일이며 동시에 영원하다. 시간의 흐름은 피조물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타락과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한 대속 - 그리고 인간이 은혜로 믿게 되어 구원받고 -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모든 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 그대로 영원이시며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존재이므로 당연히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창세 전에 우리를 계획하셨을 때에 이미 우리가 어떻게 타락하고 또한 구원받을 것을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도 알고 계신다. 영원이신 그분과 달리 영원하지 않은 피조물들이 ‘존재’하기 위한 요소로서 시간이 창조되었다.


V. 결론

 지금까지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충돌하지 않는가를 살펴보고, 또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더불어 하나님에게 있어 시간이란 어떠한 개념일까에 대해서도 논해보았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법칙 내에서 역사하시지만 또한 그 법칙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인간의 이해영역을 뛰어넘었다23.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한 노예로 만들지 않으시고,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주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인격체로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심과 동시에 인간의 구원을 예정하셨으며,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분명히 알고 계신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분명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렇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루어질’ 일이지만 그분께는 시간을 초월해 계셔 있으므로 현재에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시간조차도 우리를 위하여 배려되어진 선물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문헌

김영복, “마틴 루터의 기독인의 자유에 관한 분석적 고찰”, 한국대학선교학회, 대학과 선교 제 8집, 2005
명신홍, “인간의 전적 타락”, 신학지남사, 1970
안명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안명준, “칼빈의 인간론”
예영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한신대학교 출판부, 한신논문집 제 10권, 1993
임태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현대적 의미”, 한국신학연구소, 신학사상 제 138집, 2007
조익표,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 한신대학원, 1997
최종호, “예정론의 신학적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제 460호, 1997

Augustine,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선한용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
Louis Berkhof, 기독교 신학개론, 신복윤 역, 성광문화사, 1996
Wolfgang Sommer·Detlef Klahr, 교회사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백용기·홍지훈 공역, 한국신학연구소, 1998


──────────
예영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한신대학교 출판부, 한신논문집 제 10권, 1993, pp. 192-194. [본문으로]
Wolfgang Sommer·Detlef Klahr, 교회사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백용기·홍지훈 공역, 한국신학연구소, 1998, p. 175. [본문으로]
예영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한신대학교 출판부, 한신논문집 제 10권, 1993, pp. 196-197. [본문으로]
Louis Berkhof, 기독교 신학개론, 신복윤 역, 성광문화사, 1996, pp. 156-157. [본문으로]
김영복, “마틴 루터의 기독인의 자유에 관한 분석적 고찰”, 한국대학선교학회, 대학과 선교 제 8집, 2005, p. 253. [본문으로]
명신홍, “인간의 전적 타락”, 신학지남사, 1970, p. 7. [본문으로]
Louis Berkhof, Op. cit. p. 142. [본문으로]
임태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현대적 의미”, 한국신학연구소, 신학사상 제 138집, 2007, pp. 89-116. [본문으로]
Louis Berkhof, 기독교 신학개론, 신복윤 역, 성광문화사, 1996, pp. 75-76. [본문으로]
안명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본문으로]
Louis Berkhof, Op. cit. p. 76. [본문으로]
안명준, Op. cit. [본문으로]
최종호, “예정론의 신학적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제 460호, 1997, pp. 77-94. [본문으로]
때문에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예지예정을 배격한다. [본문으로]
최종호, “예정론의 신학적 이해”에 번역된 내용으로부터 인용함. 해당 논문의 주석에 의하면 출처는 Johannes Calvin, Institutio Christiane Relionis 1955, trans. by Otto Weber: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Neukirchen-Vluyn 1984 (Inst.로 약칭), III, 23, 7. [본문으로]
안명준, “칼빈의 인간론” [본문으로]
안명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본문으로]
Inst, III, 23, 8. [본문으로]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본문으로]
Augustine,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선한용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 pp. 395-396. [본문으로]
Ibid. pp. 379-394. [본문으로]
조익표,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 한신대학원, 1997. [본문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 내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을 피조물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것과 같다. [본문으로]
책으로 듣는 말씀

 
< 알기 쉬운 예정론(Predestination) 1 >
 
R.C 스프룰 지음 (생명의 말씀사) 20101105 (요약 전달: 박준호 목사)
 
*R.C Sproul :개혁주의 신학계를 이끌어가는 신학자, 심오한 진리를 알기쉽게 설명하는 글과 강의로 유명하다.
웨스터민스터 대학과 피츠버그 대학원, 화란의 자유대학교 공부. 리폼드 신학대학원 교수, 낙스 신학 변증학 교수.
 
 
제 1장 갈등
 
예정이라는 어휘 자체가 불길한 냄새를 풍긴다. 예정론이란 숙명론으로 이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태어나기도전에 모든 것이 다 결정되었다면 인간은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이라는 어쩌면 어렵게 여겨지고 기피하고 싶어하는 주제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정론은 성경에 명백하게 제시된 교리이기 때문이다. (엡1:4,5,11 ;롬8:29...)
예정론은 결코 칼빈이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다. 신학을 성경의 토대위에 세우고자 한다면 예정의 개념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실지로 모든 교회들은 어떤 형태로든 예정론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성경적인 입장에 서려면 예정의 교리를 가지느냐 버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될 뿐이다.
 
책상위의 문구 <너는 네가 성경에서 진리라고 말하기를 원하는 사실들이 아니라 성경에서 진리라고
말하는 사실을 믿고, 설교하고,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예정론을 지지하는 개혁주의적 입장의 학자들 : 어거스틴 , 토마스 아퀴나스,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프란시스 쉐이퍼, 로저 니콜, 제임스 보이스, 필립 휴즈...
*반대견해를 가진 학자들 :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필립 멜랑크톤, 요한 웨슬리, 찰스 피니, C.S루이 스, 노르만 가이슬러, 존 워익 몽고메리, 빌리 그래함.....
 
 
제 2장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
 
예정론이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늘나라나 지옥을 우리가 그곳에 도달하기 전 뿐만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정론은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 사실은 어떻게 이해하든 아주 냉혹한 말처럼 들린다. 적어도 불신자들에게 있어선 더욱 그렇다.
1. 하나님의 주권 :주권자로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최고의 권위이시다. 다른 모든 형태의 주권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용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권위(authority)라는 말에는 그 자체 안에 주인(author)이라는 말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주권을 행사하고 계시는 모든 것들에 주인이 되신다. 피조 세계 중에 단 하나라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용 없이 움직인다면 이미 하나님은 주권자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한다면 무신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악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주권과 악의 문제 : 거룩하신 하나님과 악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느냐? 이 문제를 회의론자들은 “기독교의 아킬레스의 발꿈치(the Achilles'Heel of Christanity)"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무시하고 세상에 악이 들어왔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악조차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말인가? 여기서 많은 신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야기한다. 악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서 죄를 범하려는 최초의 성향을 얻었을까? 우리는 이 문제를 사탄에게로 돌린다. 사단에서 속아서 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단지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면 모든 죄는 사단의 것이다. 그러나 사단이 하나님의 말을 인용했을 때, 아담과 하와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결구 선악과를 먹은 것은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서이다.
타락하기 전 인간은 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죄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죄를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질문에 모두 답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우리가 아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악이 발생하도록 허용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결정을 악하다고 말할수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 악을 허용하신 사실도 선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용하신 그 악은 여전히 악한 것이다.
 
철학자들의 질문)하나님이 인간이 범죄 할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그것을 미리 막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도 않으시며, 주권자도 아니시다. 범죄를 허용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하나님이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타락한 피조물을 위하여 완전한 구원의 계획도 함께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택한 자의 구원을 예정하신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만약 타락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최종적 결정이 타락한 죄인들의 손에 맡겨져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모두 버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강요해서라도 다 구원받게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다면, 인간의 자유는 여지없이 침해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강제적인 능력을 거기에 사용하지 않으신다. 단지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택한 일부의 사람들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해선 여전히 모른다가 정직한 대답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구원받는 것이 공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다루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결정은 언제나 공의로우시다. 구원받은 사람은 긍휼을 얻은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행위에 대한 합당한 공의를 받은 것이다. (품꾼 이야기)
 
 
제 3장 예정과 자유의지
 
예정과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진다. 예정이란 어떤 힘에 의해 정해진 상태이고, 자유란 내가 결정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유의지란 <사전의 선입견이나 성향, 특정한 기질이 없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어떤 성향이나 특정한 기질 없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결정했다면, 그것은 그런 성향이나 동기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의지를 <선택하는 마음(the mind choosing)>으로 정의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욕망을 통해 결정된다. 이것이 인간타락의 초점이다.
어거스틴은 타락한 인간이라 해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거스틴은 타락전과 타락후의 인류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1)타락전 :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2)타락후 :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무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타락 후 인간은 죄없이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면 다시 죄를 범하지 않을 능력을 소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죄를 범할수 있는 능력도 제거되지는 않는다.
 
육신에 있는 자들과 육신에 있지 않은 자들을 구분해 주는 것은 성령의 내주이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수 없다(요6:44)고 하셨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욕망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원죄란 최초의 죄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인 죄악된 상태이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범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예수님의 도우심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면에서 예정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교리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주 계속)
 
책으로 듣는 말씀
 
 
                              < 알기 쉬운 예정론(Predestination) 2 >

R.C 스프룰 지음 (생명의 말씀사) 20101112 (요약 전달: 박준호 목사)
 
 
제 4 장 아담의 타락과 나의 타락
 
예정의 교리 속에 감추어진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우리의 죄악 된 성품을 어떻게 아담에게서 물려받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세운 적이 없다. 우리의 불평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담은 확실히 우리 모두를 대표한다.(롬5:12-19) 타락의 저주가 모든 인류에게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고, 그것을 허용하셨다. 타락은 일종의 사고가 아니다. 어쩌다가 죄의 구덩이로 미끄러진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두 발로 뛰어든 것이다. 타락을 예정하신 하나님은 또한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도 예정하셨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도 우리를 대표할 수 없다. 우리에게 타락이 없었던 것처럼 구원도 없다.
 
 
제 5 장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 거듭남과 신앙
 
칼빈의 5가지 원리 (TULIP) 1)Total Depravity(전적 타락) 2)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3)Limited Atonement(제한적 속죄) 4)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5)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
*중요한 예화 1.죽을병이 들어 고통당하는 사람(죄인) 몸은 전적으로 마비되어 있다.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 치료약을 주셔야만 회복할 수 있다. 혼수상태다. 하나님이 치료약을 만들어 주셔야 살 수 있다. 하나님이 99%의 일을 하신다. 하지만, 1%는 인간이 할 일이다. 그것은 그 치료약을 입을 벌려 먹는 일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2. 타락한 인간을 수영을 못해 물에 빠진 사람으로 비유된다. 두 번이나 물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다시 물 밑으로 들어가면 죽을 것이다. 유일한 소망은 구명대를 던져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선을 정확하게 그 사람의 손앞에 던지신다. 이제 그 사람이 구명대를 붙들면 살고, 거절하면 죽는다. 그것이 그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이다. 이 두 가지 예화가 보통 우리가 이해하는 자유의지와 구원의 상관관계일 것이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이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고 본다. 아직 입을 벌리고, 구명대를 잡을 정도의 기운이 남아있다. 타락성 가운데서도 미미하지만, 선을 행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견해는 인간은 완전히 죽었다고 선포한다. 그는 입을 벌릴 수도 없다. 구명대를 잡을 힘도 능력도 없다. 그는 이미 물에 가라앉아 죽었다. 이 죽은 사람을 하나님이 건지셔서 인공호흡을 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셨다.(거듭남, 중생)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회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되는 것이다. 오직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성품과 성향을 주시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요6:37)
*칼빈주의에 대한 오해 :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선택하도록 강요하시는 반면 다른 사람들에겐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는 것을 칼빈주의로 오해한다.
하나님은 필사적으로 구원 받으려는 사람을 못 오시도록 막으신 적이 없으시다. 예정에 관한 중요한 핵심은 생래적 인간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원하는 마음을 심어주실 때에만 그리스도를 원하게 되며 갈망까지 가지게 된다.
그것을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표현한다.
 
 
제 6 장 예정은 이중적인가?
 
이중적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의 마음속에는 믿음을 일으키시고, 버린 자들의 마음속에는 불신앙을 심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혁주의적 견해가 아니다. 칼빈주의 견해는 선택의 작정은 적극적인 것이고, 유기의 작정은 소극적인 것이다. 이중적이라는 말은 그 근거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했다는 구절(출7:2-5)과 롬 9장의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불신앙을 심어주실 필요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원래 사람의 마음은 강퍅하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 행사하고 있는 억제력을 제거하시면 된다. 하나님은 때로 구속적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타락한 인간들의 악한 의도와 사악한 성향들을 사용하신다.(바로, 가룟유다..) 택함받은 자들은 긍휼을 받는 것이고,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공의를 받는 것이다. 롬9:16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원한다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구절은 알미니우스주의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구절이다.
 
제 7 장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당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딤후4:6-8)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에 대한 내적 증거를 통해 고양된다.(롬8:1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확신을 가지게 된다.
A.A.Hodge는 참된 확신과 잘못된 확신 사이를 이렇게 구별했다.
참된 확신은 꾸밈없는 겸손을 가져온다. 거룩한 부지런함으로 인도한다. 정직한 자기 성찰로 인도하며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한 관계를 사모한다. 반면 거짓 확신은 영적 교만을 가져온다. 게으른 방종으로 인도한다. 정확한 평가를 회피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냉담하다.
그런데, 이 구원의 확신은 확대될 수도 있고, 위축될 수도 있다. 적어도 얼마동안 상실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다윗), 커다란 고통에 노출될 때(욥) 구원의 확신은 위축된다.
1. 우리의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는가? 로마 카톨릭은 사실상 칭의의 은혜가 상실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치명적인 죄”를 범할 때 영혼속에서 구원의 은혜가 파괴되는데, 고백성사를 통해 회복되지 않으면 멸망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신앙은 치명적인 죄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죄가 죽음을 가져오므로 모든 죄가 치명적이라고 믿는다.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을 풀이하면 ‘당신이 은혜를 받았다면 결코 그것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며 은혜를 상실했다면 결코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존하신다. (빌1:6)(요10:27-29)(롬8:33-39)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은 삼위일체의 사역이다.(요17:11-12)
알미니우스의 견해는 아이의 안전은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이의 힘에 달려있다. 칼빈주의 견해는 아이의 안전은 그 손을 붙잡고 있는 아버지의 힘에 달려있다. 아이가 손을 놓으면 아버지가 다시 굳게 잡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를 믿다가 타락한 사람은 어떻게 설명이 될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도 심각하게 타락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전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다윗,베드로) 믿다가 타락한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며, 애당초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유다도 처음부터 멸망의 자식이었으며, 그의 회심은 가짜였다. 세 가지 범주의 사람들이 있다.
1)신자들 2)교회안의 불신자들 3)교회 밖의 불신자들 - 그러므로 고전9:27, 딤후2:17-18, 히6:4-6 은 교회안의 불신자들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참된 신자가 아닌 것이다.
 
 
제 8 장 예정에 관한 질문과 반대
 
1.예정은 숙명론인가? 숙명론은 인간사의 많은 일들이 변덕스러운 신들(운명론)이나 비인격적인 우연의 힘에 의해 통제된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복잡한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해 우연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상 우연히 설명할 건 없다. 단지 인간의 무지를 표현할 뿐이다. 우리의 운명은 우연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이 질서정연한 우주가 우연에 의해 창조되었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2. 성경은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하지 않는가?(벧후 3:9구절에 대해)
만인구원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죄란 무엇인가? (마12:31-32구절에 대해)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죄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저질러지는 죄가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실히 알면서도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죄는 마귀들과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죄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
4.예정은 전도의 사명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미리 결정되었다면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말이다. (롬10:13-15) 우리를 택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가 전도의 사명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의무이자 특권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목적을 미리 정한 것 같이 그 방편도 미리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데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그 일에 있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나 우리를 통한 전도는 외적 부르심이다. 내적으로 부르시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다.
 
결론 : 예정의 진리는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난다. 예정의 교리는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준다. 하나님께서 멸망의 길에 버려진 우리를 자신의 선하신 뜻대로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것이다. 오히려 구원의 결정이 변덕스런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음으로 안도하게 된다. 그래서 예정은 오직 찬양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롬11:33,36)
Subscribe to RSS Feed Follow me on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