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6일 일요일

본 text는 설표말씀을 필서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색채가 가미되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2013.5.25 주일설교  이창경 목사님

누가복음 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시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문둥병의 특징은 감각이 없습니다. 접촉으로 전염되어 격리시켜야 하는데 한국은 소록도에 문둥병환자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3:3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찌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그 당시 악성피부병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나병이 왜 부정하게 취급되었을까요? 이것은 의학적이나 윤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 병이 지니는 발육성, 전염성, 격리성 등이 죄의 속성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나병으로 판명된 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레위기 13:45-46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

환자가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슬픔을 나타낼 때 옷을 찢고 머리를 풀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진 안에 거할 수 없는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였으며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표현으로 머리를 풀고 옷을 찢었습니다.

윗입술을 가리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윗입술을 가리는 것은 자기 증오와 자기 비하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나병 환자들은 사람이 접근해 올 때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침으로써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정한 모습을 스스로 증오한 것입니다.
본문 보시겠습니다.

13절
소리를 높여 – 부르짖는 기도를 뜻합니다.(문둥병자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목청껏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기도에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드리고 응답 받는 자세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겸손한 자세 : 성도는 당연히 주님께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내 안의 죄로 인하여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누가복음 18:11-14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식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세리)이 저(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고 기도드릴 때 의롭다 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의 말씀에 대한 자세한 설교는 아래 링크 참조.)
http://blog.naver.com/kkangfilm1/188048532

둘째, 간절한 마음 : 믿음 있고 진실한 기도여야 합니다.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 없이 드리는 기도, 진실하지 아니하고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드리는 기도는 주님께서 응답하실 수가 없습니다.

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레위기 13장, 14 장에 전염성 피부병에 관한 규례, 색점에 관한 규례, 전염성 피부병의 정결 규례, 색점의 정결 규례가 나타나 있습니다.
문둥병을 돌보고 예방하는 책임이 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말 한마디에 격리되고 나으면 정하다는 판결을 제사장이 내렸습니다.
몸을 보이라 : 아직 문둥병이 낫지도 않은 상태인데 무턱대로 가서 보이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 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 개인적으로 필요한 묵상
시기적으로 마태복음 8장(누가복음 5장 13절)의 문둥병자 고침 이적이 먼저입니다.
그때는 손을 대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신 후 즉시 고쳐졌으나 지금은 문둥병자를 보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 말씀하심으로 병이 고쳐졌습니다.
손을 대지도 않았고 별다른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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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병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제사장에게 갔다가 문둥병이라고 재판정 받으면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자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지 않으면 평생 문둥병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의 말을 따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제사장을 찾아가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의지했더니 가는 도중에 병이 나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모순되는 고로 나는 믿는다, 주님의 능력을”
이성에 맞고 합리적이라면 이 세상에 주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기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순된 것 같아도 순종하면 진리 됨을 알게 됩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는 것,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오래 믿어도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면 그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믿음도 없고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시는데
"너희들 각자 돌 하나씩 가지고 올라가라"하고
산 어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충성스럽게도 아주 큰 돌을 들고 끙끙대면서 올라갔습니다.
요한은 아주 예쁘게 생긴 돌을 하나 골라 가지고 올라갔고,
야고보는 성미가 급해 아무 돌이나 집어 들고 올라갔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돌은 왜 가져가라고 하시나?
산 위에도 돌은 많은데..." 하면서 마지못해 하나 들고 가다가
무거워지면 도중에서 가벼운 것으로 바꾸면서 어쨌든 산 위까지 하나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가룟 유다는 역시 말썽입니다.
"그것 참 돌은 가져가서 무엇을 하겠다는거야?" 하고 투덜거리더니
겨우 주워 간 것이 밤톨만한 것이었습니다.
산 위에 오르자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축사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돌들이 모두 떡으로 변했습니다.
베드로는 큰 떡을 가지게 되어 모두에게 나누어 줄 수가 있었습니다.
요한의 떡은 아주 맛있는 떡이 되어서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야고보의 떡은 마구잡이 떡이요, 도마의 떡은 설익었으며,
유다의 떡은 말 할 것도 없이 밤톨만한 것이었는데
맛도 변해 있었습니다.
우수꽝스러운 이 이야기는 믿음과 순종(順從)의 중요성을 말해 줍니다.
믿음은 자라나는 것이며 순종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잘 듣고 배우되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16절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나머지 아홉명은?
가족에게 갔거나, 동네 가서 병이 나았다고 자랑하려고?
재발을 의심하고 완전히 나은 것을 확인한 후에 가려고 했거나 지저분한 모습을 깨끗이 하고 예물을 준비해서 가려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주님 앞입니다. 인간적인 세상이 많아지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각기 제 갈길로 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17,18절
1명은 이방인, 9명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알고 자라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전한 구원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감사함과 기쁨입니다.
온전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는 주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 중 감사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왜?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이 많지 않듯이 신앙,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에 감사하는 성도를 찾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범사에 감사’ 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따지다보면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문둥병이 나았는데 그 간에 받은 고통과 설움을 떠올립니다. 이제 앞으로 살길이 막막합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습니다. 생각이 많기 때문에 병 고침 받은 은혜가 며칠을 못가고 감사하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감사는 주신 은혜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가진 것 없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 많이 겪습니다. 하지만 항상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참 감사는 깨달음에 있는 것이고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은혜 많이 받은 자가 더욱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잠언 29:21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
종도 잘 양육 받으면 그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주인을 부모처럼 여길 수도 있게 됩니다.
종을 잘 양육시키려는 마음을 가진 주인이 부모처럼 대하는 종에게 어찌 더 큰 사랑을 부어주지 않겠습니까.
성도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더욱 감사함으로 더 많은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딜 가도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은혜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 되고, 병든 사람이 문제 해결되면 하나님 은혜 잊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잠언 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하나님을 모른다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신 은혜 잊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셋째,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요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끝까지 기도하고 믿고 병 낫는 체험도 했습니다. 그런데 감사는?
감사가 없습니다. 이게 약점입니다. 기쁨이 적습니다. 행복하지 못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빨리 찾는 길입니다.
많이 가진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 중 감사치 않아서 불행한 사람들 많습니다. 있는 것 생각하지 않고 없는 것 생각하는 사람, 잃어버린 것 기억하고, 옛날이 좋았다고 한탄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참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믿게 된 것. 주님의 생명 말씀으로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것 얼마나 행복합니까?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을 때만이 모든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일제 치하 때 공장에서 일하다 일본사람이 다치면 5천원 받았다 치면 한국 사람은 120원이었답니다. 나라가 지배당하니 그 나라 백성도 가치가 하락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 피로 산 것입니다.
주님이 불러주셨습니다. 구속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믿음과 겸손,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감사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각자의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어렵고 괴롭더라도 나중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에디슨은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지혜입니다.
실패한 것 , 어려웠던 것, 힘들었던 것 생각지 마시고 주님께서 주신 것 생각하십시오.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절
네 믿음이 : 감사하는 믿음, 마음속의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고 행위로 실천한 사마리아인의 믿음입니다.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감사하는 생활은 하나님을 높이고 시인하는 생활이기에 주님의 은혜와 믿음이 자라납니다.
교회도 성장하려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넘어질 때 붙들어 주신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코 우연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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