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현 목사님의 문제가 불거져 세간에 그분의 성함이 오르 내릴 때 옥성호 라는 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님이셨던 故 옥한흠 목사님의 아드님이다.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궁금하던 차에 옥성호 집사님의 글들을 읽게 되었었다.
마음에 와 닿으면서 당시 안타깝다는 여운이 지금도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그 분이 쓰신 글을 보게 되었다.
꼭 우리 아버지 같다. 개인적으로 도전적이고 진실, 진리에 대한 열정이 넘쳐나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거친 풍랑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풍속에서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담패파이프를 입에 물고 Steering 을 끝까지 놓지 않을 법한...
미국의 한 식당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제시한 의견이 나름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출처 : http://godswill.com.br/xe/SungHo/11980
불평 안 했으면 좋겠어요...
미국에 오래 살면 어떻게 된 게 영어가 늘어야 하는데 오히려 한국말이 더 늡니다. 영어는 점점 더 외국어로 들리고 한국어는 더욱 더 또렷하게 들리니까요. 가끔씩 식당과 같이 미국인이 많은 곳에 앉아있으면 주변을 가득 채운 영어의 웅성거림을 뚫고 한 줄기 시냇물과 같이 청아하게 들리는 한국어는 기가 막히게 리스닝이 됩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하지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우리의 마음속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이렇게 또렷이 구분해서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요.
하지만 이토록 잘 들리는 한국어 리스닝 실력이 항상 기쁨만 주는 건 아니랍니다.
한 3년 전이었습니다.
심부기가 나온 후 채 몇 달이나 지났을까요?
미국인이 주로 가는 식당에 갔습니다. 한 테이블 정도 떨어진 곳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와서 앉더군요. 그들이 내 눈에 띄었듯 분명 그들의 눈에도 혼자 앉아 있는 동양인인 제가 확 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스스럼없이 우리말로 대화를 시작하더군요. 아마 제 손에 영어책이 들려있어서 저를 우리말 모르는 한인 2세로 알았거나 아니면 중국인 또는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먼저 음식을 시키고 책을 들척이는 제 귀의 두 사람의 대화가 청아하게 들려왔습니다.
“최 목사, 요즘 한국에서 화제를 몰고 있는 그 책 읽어 봤어?”
‘목사님’도 아니고 ‘목사’라고 반말로 호칭하는 걸 보니 두 명 다 목회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불안했습니다.
‘화제의 책?? 설마....’
“무슨 책인데? 나 책 살 돈 없으니까 김 목사 당신이 다 읽었으면 나 좀 빌려줘.”
“아니, 나도 아직 사지는 않았고 그냥 말만 들었는데....저자가 워낙 특이해서 말이야. 저자가 바로 사랑의 교회의 원로인 옥한흠 목사님 아들이라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뭐? 옥한흠 목사님? 와, 그거 꽤 충격인데? 옥 목사님의 가족에 대해서는 세상에 거의 알려진 게 없잖아? 그 양반이 세습을 한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 분의 아들이 책을 냈다고? 무슨 책인데? 옥 목사님 아들이 목사였어?”
“목사는 무슨 목사! 목사나 되면 말도 안 하지. 일개 집사에 불과해. 그것도 평생 선데이 크리스천 행세를 하다가 뭐 방황도 하고 그러다가 최근에 회심을 했다고 하는데....아무튼 그 아들이 이번에 무슨 ‘부족한 기독교’라는 시리즈를 냈다는 거야. 현재의 기독교와 교회를 비판한 책이야.”
순간 조금 떨어져 앉은 제 눈에도 최 목사라는 사람의 얼굴에 스쳐가는 강한 불쾌감이 확연히 보였습니다.
“부족한 기독교? 제목부터 건방지군. 원래 부족한 인간들 눈에는 모든 게 다 부족하게 보이는 법이지. 최근에 회심을 하고 돌아왔으면 얌전하게 틀어 박혀서 기도나 하지. 김 목사, 제목만 봐도 무슨 소리 하는지 훤히 알겠어. 그런 남 비판하는 책은 읽을 생각도 하지 마. 괜히 시간 낭비, 돈 낭비니까 말이야. 게다가 일개 집사면 신학교도 안 다녔겠구먼. 그런 친구가 알면 뭘 알겠어? 집사 주제에....옥 목사님도 골치 아프시겠어, 아들 때문에.”
“맞아, 뭐, 그런 면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그 책이 꽤 화제를 불러일으켰나봐. 일단 옥 목사님이 워낙 한국 교회의 어른이신데도 불구하고 다른 목사님들에 비해서 워낙 그 가족이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그 아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하지. 게다가 좀 충격적인 게, 그 책 내용이 상당부분 여러 유명 교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랑의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에 대해서까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거든. 그래서 목사들 사이에서는 과연 옥 목사님께서 이 책의 출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놓고 말들이 많아.”
“김 목사, 다른 건 생각할 거 없고.....내 생각에 제목만 보면 뻔해.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어. 또 일개 집사가 썼다고 하면 그 수준은 보나 마나야. 김 목사, 우리는 비판하면 안 돼. 비판은 열등감에 가득 찬 인간이 즐겨하는 사탄의 도구야. 가뜩이나 한국 교회가 이래저래 사방팔방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판에 교회를 살리고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교회 안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책이나 써서 세상 시류에 편승하려고 하다니 말이야. 그런 책들은 그냥 다 갖다 버려야 해. 아무튼, 요즘 평신도들 머리만 커져서 목사들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거 보면....참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봐, 최 목사, 이참에 당신이 ‘충분한 기독교’ 한번 써보지 그래? 하하하.”
“그래야지, 누군가는 꼭 그런 책을 써서 교회를 살려야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듣는 것....나름대로 엄청 독특한 경험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날의 경험은 독특했는지는 몰라도 결코 유쾌하지는 않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위의 두 목사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제 입장에서 가장 답답한 점은 읽지도 않고 이미 ‘뻔하다’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입니다. 위의 최/김 목사님들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책에 대한 소문만 듣고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 책에 제대로 된 대안이 있던가요? 아니 대안을 떠나서 남 비판해서 남는 게 뭐가 있나요?”
그런데 저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숙을 가장한 불평자’로 보입니다. 불평을 할 때도 어떻게 하든 ‘영적 핑계’를 갖다 대며 자기 자신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다독거려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바꿀 수 없습니다.
“정말로 내게 중요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대상에 대해서 나는 비판적이 된다. 그리고 그 비판은 파괴가 아니라 살리기 위한 비판이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또 조롱적이기까지 합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분열시키고 망하게 하기 위해서 그랬을까요? 그런 편지를 쓰면서 바울의 마음은 기뻤을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가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냥 ‘무조건 다 좋아~’라고 말하는 경우는 제가 볼 때 다음 두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1. 사실은 그 대상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2. 문제점을 지적해봤자 어차피 해결도 안 될 거.....라는 결론을 이미 내린 상태이다.
아파트를 계약할 때 그 매매 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그냥 ‘긍정적’으로 웃으면서 다 좋다는 식으로 인감을 찍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자세가 긍정적이고 성숙하다고 하나요? 아니지요. 그런 태도는 ‘멍청하다’라고 합니다. 정말로 자기한테 중요한 문제라면 사람은 비판적이 되고 더 차근차근 따지고 듭니다. 물론 세상에는 ‘비판을 위한 비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또는 소중해서 하는 비판은 ‘창조적인 비판’입니다.
교회가 정말로 중요하고 말씀이 정말 소중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오늘의 교회를 말씀에 비추어 점검하는 태도를 게을리 할 수 있습니까? 물론....부족한 기독교 시리즈가 주장하는 것이 다 맞을 수는 없겠지요. 더 많이 보완되고 또 분명히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들도 많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교회 속에 이루어져 간다고 저는 믿습니다.
문제는....성숙을 가장한 불평은 건전한 논의 자체를 실종시킨다는 데에 있습니다.
부족한 기독교가 ‘부족하나마’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서 저는 다 답을 제시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건전한 토론이 이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는 노력과 인내가 합쳐질 때 우리 교회 속에 ‘탁상공론의 신학’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신학’이 뿌리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 그런 책을 읽으면 영이 혼탁해지는 것 같더군요.
- 긍정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 같아요.
- 은혜가 안 되더군요.
이런 ‘거룩과 성숙을 가장한 불평들’ 대신 지금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어 속에서 들리는 한국어처럼 성령님의 음성이 우리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리도록 말입니다.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궁금하던 차에 옥성호 집사님의 글들을 읽게 되었었다.
마음에 와 닿으면서 당시 안타깝다는 여운이 지금도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그 분이 쓰신 글을 보게 되었다.
꼭 우리 아버지 같다. 개인적으로 도전적이고 진실, 진리에 대한 열정이 넘쳐나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거친 풍랑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풍속에서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담패파이프를 입에 물고 Steering 을 끝까지 놓지 않을 법한...
미국의 한 식당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제시한 의견이 나름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출처 : http://godswill.com.br/xe/SungHo/11980
불평 안 했으면 좋겠어요...
미국에 오래 살면 어떻게 된 게 영어가 늘어야 하는데 오히려 한국말이 더 늡니다. 영어는 점점 더 외국어로 들리고 한국어는 더욱 더 또렷하게 들리니까요. 가끔씩 식당과 같이 미국인이 많은 곳에 앉아있으면 주변을 가득 채운 영어의 웅성거림을 뚫고 한 줄기 시냇물과 같이 청아하게 들리는 한국어는 기가 막히게 리스닝이 됩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하지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우리의 마음속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이렇게 또렷이 구분해서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요.
하지만 이토록 잘 들리는 한국어 리스닝 실력이 항상 기쁨만 주는 건 아니랍니다.
한 3년 전이었습니다.
심부기가 나온 후 채 몇 달이나 지났을까요?
미국인이 주로 가는 식당에 갔습니다. 한 테이블 정도 떨어진 곳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와서 앉더군요. 그들이 내 눈에 띄었듯 분명 그들의 눈에도 혼자 앉아 있는 동양인인 제가 확 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스스럼없이 우리말로 대화를 시작하더군요. 아마 제 손에 영어책이 들려있어서 저를 우리말 모르는 한인 2세로 알았거나 아니면 중국인 또는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먼저 음식을 시키고 책을 들척이는 제 귀의 두 사람의 대화가 청아하게 들려왔습니다.
“최 목사, 요즘 한국에서 화제를 몰고 있는 그 책 읽어 봤어?”
‘목사님’도 아니고 ‘목사’라고 반말로 호칭하는 걸 보니 두 명 다 목회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불안했습니다.
‘화제의 책?? 설마....’
“무슨 책인데? 나 책 살 돈 없으니까 김 목사 당신이 다 읽었으면 나 좀 빌려줘.”
“아니, 나도 아직 사지는 않았고 그냥 말만 들었는데....저자가 워낙 특이해서 말이야. 저자가 바로 사랑의 교회의 원로인 옥한흠 목사님 아들이라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뭐? 옥한흠 목사님? 와, 그거 꽤 충격인데? 옥 목사님의 가족에 대해서는 세상에 거의 알려진 게 없잖아? 그 양반이 세습을 한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 분의 아들이 책을 냈다고? 무슨 책인데? 옥 목사님 아들이 목사였어?”
“목사는 무슨 목사! 목사나 되면 말도 안 하지. 일개 집사에 불과해. 그것도 평생 선데이 크리스천 행세를 하다가 뭐 방황도 하고 그러다가 최근에 회심을 했다고 하는데....아무튼 그 아들이 이번에 무슨 ‘부족한 기독교’라는 시리즈를 냈다는 거야. 현재의 기독교와 교회를 비판한 책이야.”
순간 조금 떨어져 앉은 제 눈에도 최 목사라는 사람의 얼굴에 스쳐가는 강한 불쾌감이 확연히 보였습니다.
“부족한 기독교? 제목부터 건방지군. 원래 부족한 인간들 눈에는 모든 게 다 부족하게 보이는 법이지. 최근에 회심을 하고 돌아왔으면 얌전하게 틀어 박혀서 기도나 하지. 김 목사, 제목만 봐도 무슨 소리 하는지 훤히 알겠어. 그런 남 비판하는 책은 읽을 생각도 하지 마. 괜히 시간 낭비, 돈 낭비니까 말이야. 게다가 일개 집사면 신학교도 안 다녔겠구먼. 그런 친구가 알면 뭘 알겠어? 집사 주제에....옥 목사님도 골치 아프시겠어, 아들 때문에.”
“맞아, 뭐, 그런 면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그 책이 꽤 화제를 불러일으켰나봐. 일단 옥 목사님이 워낙 한국 교회의 어른이신데도 불구하고 다른 목사님들에 비해서 워낙 그 가족이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그 아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하지. 게다가 좀 충격적인 게, 그 책 내용이 상당부분 여러 유명 교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랑의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에 대해서까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거든. 그래서 목사들 사이에서는 과연 옥 목사님께서 이 책의 출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놓고 말들이 많아.”
“김 목사, 다른 건 생각할 거 없고.....내 생각에 제목만 보면 뻔해.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어. 또 일개 집사가 썼다고 하면 그 수준은 보나 마나야. 김 목사, 우리는 비판하면 안 돼. 비판은 열등감에 가득 찬 인간이 즐겨하는 사탄의 도구야. 가뜩이나 한국 교회가 이래저래 사방팔방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판에 교회를 살리고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교회 안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책이나 써서 세상 시류에 편승하려고 하다니 말이야. 그런 책들은 그냥 다 갖다 버려야 해. 아무튼, 요즘 평신도들 머리만 커져서 목사들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거 보면....참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봐, 최 목사, 이참에 당신이 ‘충분한 기독교’ 한번 써보지 그래? 하하하.”
“그래야지, 누군가는 꼭 그런 책을 써서 교회를 살려야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듣는 것....나름대로 엄청 독특한 경험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날의 경험은 독특했는지는 몰라도 결코 유쾌하지는 않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위의 두 목사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제 입장에서 가장 답답한 점은 읽지도 않고 이미 ‘뻔하다’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입니다. 위의 최/김 목사님들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책에 대한 소문만 듣고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 책에 제대로 된 대안이 있던가요? 아니 대안을 떠나서 남 비판해서 남는 게 뭐가 있나요?”
그런데 저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숙을 가장한 불평자’로 보입니다. 불평을 할 때도 어떻게 하든 ‘영적 핑계’를 갖다 대며 자기 자신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다독거려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바꿀 수 없습니다.
“정말로 내게 중요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대상에 대해서 나는 비판적이 된다. 그리고 그 비판은 파괴가 아니라 살리기 위한 비판이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또 조롱적이기까지 합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분열시키고 망하게 하기 위해서 그랬을까요? 그런 편지를 쓰면서 바울의 마음은 기뻤을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가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냥 ‘무조건 다 좋아~’라고 말하는 경우는 제가 볼 때 다음 두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1. 사실은 그 대상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2. 문제점을 지적해봤자 어차피 해결도 안 될 거.....라는 결론을 이미 내린 상태이다.
아파트를 계약할 때 그 매매 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그냥 ‘긍정적’으로 웃으면서 다 좋다는 식으로 인감을 찍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자세가 긍정적이고 성숙하다고 하나요? 아니지요. 그런 태도는 ‘멍청하다’라고 합니다. 정말로 자기한테 중요한 문제라면 사람은 비판적이 되고 더 차근차근 따지고 듭니다. 물론 세상에는 ‘비판을 위한 비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또는 소중해서 하는 비판은 ‘창조적인 비판’입니다.
교회가 정말로 중요하고 말씀이 정말 소중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오늘의 교회를 말씀에 비추어 점검하는 태도를 게을리 할 수 있습니까? 물론....부족한 기독교 시리즈가 주장하는 것이 다 맞을 수는 없겠지요. 더 많이 보완되고 또 분명히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들도 많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교회 속에 이루어져 간다고 저는 믿습니다.
문제는....성숙을 가장한 불평은 건전한 논의 자체를 실종시킨다는 데에 있습니다.
부족한 기독교가 ‘부족하나마’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서 저는 다 답을 제시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건전한 토론이 이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는 노력과 인내가 합쳐질 때 우리 교회 속에 ‘탁상공론의 신학’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신학’이 뿌리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 그런 책을 읽으면 영이 혼탁해지는 것 같더군요.
- 긍정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 같아요.
- 은혜가 안 되더군요.
이런 ‘거룩과 성숙을 가장한 불평들’ 대신 지금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어 속에서 들리는 한국어처럼 성령님의 음성이 우리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리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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