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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7일 월요일

성령의 증거

고재수교수

성령의 증거라는 말에 대하여 여러 신학자들은 성령이 어떤 사실 즉,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직접 우리 마음에 말씀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 두 가지 방법 즉, 성경과 성령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성령님이 성경 외에 어떤 것도 우리에게 직접 계시하심을 말하지는 않는다.

첫째로
칼빈은 성령의 증거란 표현뿐만 아니라 다른 표현도 사용했다. 성령이 우리를 설득하도록 우리 마음 속에 ‘침입’해야 한다는 말을 사용한다. 또 고후 1:22에 나오는 “인치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칼빈은 성령이 인침과 보증이라 말하기도 한다. 같은 문장 속에서 칼빈은 또 다른 표현 곧, “성령이 지성을 조명하신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침 자체는 어떤 복음의 내용에 아무 말이라도 더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 눈의 어두움을 제거하는 빛은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다른 표현들은 성령이 인간의 마음속에 성경에 없는 어떤 것을 계시하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님이 성경의 내용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시는 일을 한다는 것이 칼빈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인 것이다.

둘째로
칼빈은 성령의 임무는 새롭고 들어 본 적 없는 계시를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복음이 제시한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인치시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칼빈은 성령의 증거가 성경에 없는 어떤 것을 계시하심이라는 입장을 직접적으로 반대한다.
칼빈은 성령이 어떻게 증거하시는지를 우리가 명백하게 알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비밀한 성령의 증거라고 말했다. 칼빈은 모든 신자가 그것을 경험한다고 하였고 이것을 그의 말로써 올바르게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칼빈의 의견을 요약해 보자면, 성령의 증거란 성령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또 우리는 성령님이 어떻게 증거하시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성령님이 증거하신 사실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성령의 증거라는 주제를 매우 넓게 사용했다. 그 증거가 확인해 주는 것으로는 이러한 것들이 있다.

1) 성경 신적 원천(딤후3:16, 요일2:27)
2) 그리스도의 씻음과 희생(요일5:8)
3) 구원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4) 하나님의 양자됨(롬8:16,갈4:6,엡1:13, 요일2:19, 3:24, 약1:25, 고전2:12)
5) 하나님의 진리, 특히 그리스도에 관하여(요15:26, 고전1:6, 요일2:27)
6) 그리스도의 부활(롬1:4)
7) 선택(롬8:23, 고전1:9, 벧전1:1,2)
8) 구원에 관한 온전한 교훈(고전2:10). 복음의 교훈(고전2:11)
9) 하나님의 모든 약속, 하나님의 말씀(고후1:20, 5:5, 엡1:14)

이처럼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다 증거하시고 그 중 특별한 주제도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우리가 특별히 연구하고자 하는 성경과 관련된 성령의 증거는 그의 모든 증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칼빈은 성령의 증거는 성경의 말씀 속에 숨겨진 말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계시된 내용에 대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성경)을 향하여 순수한 시각과 곧은 감각으로 대한다면 하나님의 위엄은 즉각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고, 우리의 대담한 거부를 억눌러 우리로 하여금 순종케 할 것이다.
이를 볼 때 깨닫지 못함은 인간 편에 문제가 있어서이다. 곧 사람에게 순수한 눈이 없기 때문이다. (딤후 3:16의 주석에서 표현)

비록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지라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성령으로 눈 밝혀진 사람 외에는 없다. 이 사람들만이 모든 사람에게 보이도록 되어 있지만 선택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들을 보게 된다.

우리의 정신은 하나님의 진리에 한 번도 결합할 수 없을 만한 헛된 것에 쏠려 있고 그 침체된 상태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앞에 항상 어둡기만 하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 없이는 성경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상에서 보듯이 성령의 증거의 필요성은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죄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빛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영이 볼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것이라도, 예를 들자면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인 것조차 받아 들이지 못하게 된다.

박길현 목사님의 글을 발췌하였습니다.


교리란 성경을 근거로 해서 만든 것이다.
신앙의 뼈대를 제시하여 믿는 바가 무엇인지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무엇을 어떻게 믿는 것인지를 믿는 자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교리는 성도로 하여금 그것에 비추어서 바른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갖고 잘못된 가르침을 구별하며 대항하게 한다.
그래서 성도는 이단과 거짓 종교의 가르침에서 바른 믿음을 지키게 된다.
교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교리를 정리한 목적이 성경의 원리를 가능한 바르게 제시하여 따르도록 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교리는 성경을 해석하고 정리한 것일 뿐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교리는 성경을 해석해 놓은 인간의 작업의 산물이요, 이와 달리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절대적인 것이요, 교리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리는 항상 성경 말씀에 준해서 만들어지고, 성경 말씀에 따라서 가르쳐야 하며, 성경 말씀에 복종해야 할 위치에 있다.
이론상 이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교리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표면적으로는 교리를 성경처럼 절대시하는 한 부류가 있다.
이런 부류를 교조주의자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 부류는 교리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부류이다.
 
왜 교리를 성경처럼 절대시 할까?
인간이란 태어난 이후부터 살아오는 중에 이런 저런 열등의식이 쌓이게 되어 있다.
여기서 계급의식과 지배의식이 생겨나고 또한 소유의식이 형성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의식은 한 마디로 죄인인 옛 사람의 속성이다.
따라서 복음을 알고 나면 이런 것도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것들 모두가 육에 속한 것이요, 세상에 대한 욕심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온통 죄악덩어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복음이다.
따라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이러한 인간성 자체도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복음은 이런 인간성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그래서 쓰레기처럼, 똥처럼 버리게 하고, 추구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오정현 목사님의 문제가 불거져 세간에 그분의 성함이 오르 내릴 때 옥성호 라는 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님이셨던 故 옥한흠 목사님의 아드님이다.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궁금하던 차에 옥성호 집사님의 글들을 읽게 되었었다.
마음에 와 닿으면서 당시 안타깝다는 여운이 지금도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그 분이 쓰신 글을 보게 되었다.

꼭 우리 아버지 같다. 개인적으로 도전적이고 진실, 진리에 대한 열정이 넘쳐나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거친 풍랑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풍속에서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담패파이프를 입에 물고 Steering 을 끝까지 놓지 않을 법한...

미국의 한 식당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제시한 의견이 나름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출처 : http://godswill.com.br/xe/SungHo/11980


불평 안 했으면 좋겠어요...

미국에 오래 살면 어떻게 된 게 영어가 늘어야 하는데 오히려 한국말이 더 늡니다. 영어는 점점 더 외국어로 들리고 한국어는 더욱 더 또렷하게 들리니까요. 가끔씩 식당과 같이 미국인이 많은 곳에 앉아있으면 주변을 가득 채운 영어의 웅성거림을 뚫고 한 줄기 시냇물과 같이 청아하게 들리는 한국어는 기가 막히게 리스닝이 됩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하지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우리의 마음속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이렇게 또렷이 구분해서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요.

하지만 이토록 잘 들리는 한국어 리스닝 실력이 항상 기쁨만 주는 건 아니랍니다.

한 3년 전이었습니다.
심부기가 나온 후 채 몇 달이나 지났을까요?

미국인이 주로 가는 식당에 갔습니다. 한 테이블 정도 떨어진 곳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와서 앉더군요. 그들이 내 눈에 띄었듯 분명 그들의 눈에도 혼자 앉아 있는 동양인인 제가 확 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스스럼없이 우리말로 대화를 시작하더군요. 아마 제 손에 영어책이 들려있어서 저를 우리말 모르는 한인 2세로 알았거나 아니면 중국인 또는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먼저 음식을 시키고 책을 들척이는 제 귀의 두 사람의 대화가 청아하게 들려왔습니다.

“최 목사, 요즘 한국에서 화제를 몰고 있는 그 책 읽어 봤어?”

‘목사님’도 아니고 ‘목사’라고 반말로 호칭하는 걸 보니 두 명 다 목회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불안했습니다.

‘화제의 책?? 설마....’

“무슨 책인데? 나 책 살 돈 없으니까 김 목사 당신이 다 읽었으면 나 좀 빌려줘.”

“아니, 나도 아직 사지는 않았고 그냥 말만 들었는데....저자가 워낙 특이해서 말이야. 저자가 바로 사랑의 교회의 원로인 옥한흠 목사님 아들이라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뭐? 옥한흠 목사님? 와, 그거 꽤 충격인데? 옥 목사님의 가족에 대해서는 세상에 거의 알려진 게 없잖아? 그 양반이 세습을 한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 분의 아들이 책을 냈다고? 무슨 책인데? 옥 목사님 아들이 목사였어?”

“목사는 무슨 목사! 목사나 되면 말도 안 하지. 일개 집사에 불과해. 그것도 평생 선데이 크리스천 행세를 하다가 뭐 방황도 하고 그러다가 최근에 회심을 했다고 하는데....아무튼 그 아들이 이번에 무슨 ‘부족한 기독교’라는 시리즈를 냈다는 거야. 현재의 기독교와 교회를 비판한 책이야.”

순간 조금 떨어져 앉은 제 눈에도 최 목사라는 사람의 얼굴에 스쳐가는 강한 불쾌감이 확연히 보였습니다.

“부족한 기독교? 제목부터 건방지군. 원래 부족한 인간들 눈에는 모든 게 다 부족하게 보이는 법이지. 최근에 회심을 하고 돌아왔으면 얌전하게 틀어 박혀서 기도나 하지. 김 목사, 제목만 봐도 무슨 소리 하는지 훤히 알겠어. 그런 남 비판하는 책은 읽을 생각도 하지 마. 괜히 시간 낭비, 돈 낭비니까 말이야. 게다가 일개 집사면 신학교도 안 다녔겠구먼. 그런 친구가 알면 뭘 알겠어? 집사 주제에....옥 목사님도 골치 아프시겠어, 아들 때문에.”

“맞아, 뭐, 그런 면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그 책이 꽤 화제를 불러일으켰나봐. 일단 옥 목사님이 워낙 한국 교회의 어른이신데도 불구하고 다른 목사님들에 비해서 워낙 그 가족이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그 아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하지. 게다가 좀 충격적인 게, 그 책 내용이 상당부분 여러 유명 교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랑의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에 대해서까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거든. 그래서 목사들 사이에서는 과연 옥 목사님께서 이 책의 출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놓고 말들이 많아.”

“김 목사, 다른 건 생각할 거 없고.....내 생각에 제목만 보면 뻔해.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어. 또 일개 집사가 썼다고 하면 그 수준은 보나 마나야. 김 목사, 우리는 비판하면 안 돼. 비판은 열등감에 가득 찬 인간이 즐겨하는 사탄의 도구야. 가뜩이나 한국 교회가 이래저래 사방팔방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판에 교회를 살리고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교회 안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책이나 써서 세상 시류에 편승하려고 하다니 말이야. 그런 책들은 그냥 다 갖다 버려야 해. 아무튼, 요즘 평신도들 머리만 커져서 목사들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는 거 보면....참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봐, 최 목사, 이참에 당신이 ‘충분한 기독교’ 한번 써보지 그래? 하하하.”

“그래야지, 누군가는 꼭 그런 책을 써서 교회를 살려야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듣는 것....나름대로 엄청 독특한 경험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날의 경험은 독특했는지는 몰라도 결코 유쾌하지는 않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위의 두 목사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제 입장에서 가장 답답한 점은 읽지도 않고 이미 ‘뻔하다’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입니다. 위의 최/김 목사님들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책에 대한 소문만 듣고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 책에 제대로 된 대안이 있던가요? 아니 대안을 떠나서 남 비판해서 남는 게 뭐가 있나요?”

그런데 저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숙을 가장한 불평자’로 보입니다. 불평을 할 때도 어떻게 하든 ‘영적 핑계’를 갖다 대며 자기 자신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다독거려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바꿀 수 없습니다.

“정말로 내게 중요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대상에 대해서 나는 비판적이 된다. 그리고 그 비판은 파괴가 아니라 살리기 위한 비판이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또 조롱적이기까지 합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분열시키고 망하게 하기 위해서 그랬을까요? 그런 편지를 쓰면서 바울의 마음은 기뻤을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가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냥 ‘무조건 다 좋아~’라고 말하는 경우는 제가 볼 때 다음 두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1. 사실은 그 대상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2. 문제점을 지적해봤자 어차피 해결도 안 될 거.....라는 결론을 이미 내린 상태이다.

아파트를 계약할 때 그 매매 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그냥 ‘긍정적’으로 웃으면서 다 좋다는 식으로 인감을 찍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자세가 긍정적이고 성숙하다고 하나요? 아니지요. 그런 태도는 ‘멍청하다’라고 합니다. 정말로 자기한테 중요한 문제라면 사람은 비판적이 되고 더 차근차근 따지고 듭니다. 물론 세상에는 ‘비판을 위한 비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또는 소중해서 하는 비판은 ‘창조적인 비판’입니다.

교회가 정말로 중요하고 말씀이 정말 소중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오늘의 교회를 말씀에 비추어 점검하는 태도를 게을리 할 수 있습니까? 물론....부족한 기독교 시리즈가 주장하는 것이 다 맞을 수는 없겠지요. 더 많이 보완되고 또 분명히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들도 많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교회 속에 이루어져 간다고 저는 믿습니다.

문제는....성숙을 가장한 불평은 건전한 논의 자체를 실종시킨다는 데에 있습니다.

부족한 기독교가 ‘부족하나마’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서 저는 다 답을 제시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건전한 토론이 이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는 노력과 인내가 합쳐질 때 우리 교회 속에 ‘탁상공론의 신학’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신학’이 뿌리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 그런 책을 읽으면 영이 혼탁해지는 것 같더군요.
- 긍정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 같아요.
- 은혜가 안 되더군요.

이런 ‘거룩과 성숙을 가장한 불평들’ 대신 지금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어 속에서 들리는 한국어처럼 성령님의 음성이 우리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리도록 말입니다.
http://www.kcnnews.net/bbs/board.php?bo_table=words&wr_id=7 출처
   

연보란 무엇인가?
 
본질적 의미
 
고후 8:5절 “·····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자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주인이 아닌 종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를 섬김으로 ‘단순’하게 되는 행위가 연보의 본질적인 원리인 것이다. 즉 주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삶이며 받는 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주는 자로서의 삶으로 「복잡하지 않은」(하프로테토스=연보) 삶을 뜻한다.
 
신약적 의미
 
고후8:9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시고 하나님의 부요하심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부요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성도는 진정한 의미의 연보의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도는 머리되신 주님의 지체인데 머리가 주관하는 대로 지체는 활동하기 때문이다.
 
구약적 의미
 
고후8:15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모세를 따라 출애굽하여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광야의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의 만나를 내려 먹이심으로 많이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모두 다 남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부요하게 하신 역사가 곧 구약에 나타난 연보의 원리인 것이다. 

그동안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았습니다.

'창세전 선택과 하나님 형상에 관한 소고'라는 글 중 일부를 인용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믿는가? 

이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 형편 가운데서 대다수 한국 장로교인들은 칼빈주의의 창세전 선택 교리를 고백하는 동시에 알미니안 주의를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

위와 같은 상황은 제가 고민했던 부분인데요.
강대상에서 설교하시고 가르치실 때는 분명 성경의 말씀대로, 교리적으로 가르치는데 
성도의 삶은 목사님이나 교사분이 말씀하신 것과는 너무도 다른  삶입니다.
성경말씀 혹은 교리적으로 전혀 부합하지 않은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광호 목사님은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신 직접적인 기록(엡1:4)에 의존하는 한국교회의 보수적 성향과 
일반 교인들의 이웃에 대한 종교적 관용성 때문이다."

                                                                   by 이광호목사님

김홍만 교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의 진수'가 떠오릅니다.

이광호 목사님의 '창세전 선택과 하나님 형상에 관한 소고' 전문은 아래 링크 참조
http://blog.naver.com/kkangfilm1/188071233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외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유사한 말을 사용하여서 더 뜻을 잘 드러내려고 할 때에 동의어를 쓴다.
즉 비슷한 말이지만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가진 다른 말을 사용하여서 더 말하고자 하는 것을 종합적으로 드러내려고 할 때에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와 용법을 가지고 있는 비슷한 말을 사용한다.
이렇게 사용되는 말을 동의어라고 한다. 형상과 모양은 이런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하여튼 하나님의 형상 혹은 모양이라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을 꼭 빼 닮았다는 뜻이다.

“인간이 무엇에 있어서 하나님을 꼭 빼 닮았다는 말인가?” 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칼빈은 신약에서 설명한 것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식과(하나님을 아는 지식)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의와 거룩함으로 이해했다.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벌코프라는 학자는 칼빈이 말한 것에다가 지(智), 정(情), 의(意)를 첨가하였다. 지, 정, 의란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 인격적인 요소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어거스틴도 비슷하게 기억, 지성, 사랑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칼빈은 타락 후에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무용지물이 되다시피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다. 
벌코프는 칼빈이 말한 그런 면은 완전히 없어졌지만, 지, 정, 의는 타락 후에도 상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 정, 의를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 시켜서 이것들은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 역시도 기억, 지성, 사랑을 하나님의 흔적이라고 했으니 타락한 후에도 이런 것이 하나님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본 셈이다. 

벌코프나 어거스틴은 인간 자질의 특별한 면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킨 셈이고

칼빈은 하나님과 관계해서 이해한 셈이다.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하나님과 관계해서 말할 수 있는 자질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관계된 이런 것들은 타락으로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용이하다.

결국 타락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 곧 인간 고유한 자질적인 면은
1)     거의 없어졌다는 쪽으로 나뉘게 된 셈이다.
2)     남아 있다는 쪽

자질이 거의 없다는 쪽에서
칼빈의 견해를 좀 더 특별하게 정리
자질 자체보다는 인간의 자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
즉 주어진 인간의 자질을 가지고 왕이신 하나님이 부여하신 직무 곧 세상을 다스리는 총리 노릇을 잘 하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정리하였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더 이상 총리 노릇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직무를 잃어버렸으니 하나님의 형상도 사라졌다고 말하게 된 셈.

자질이 남아 있다는 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반문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자질이 거의 없다는 쪽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고유한 자질이 아니고 직무에서 찾자고 한다.
자질이 남아 있다는 쪽에서 타락한 후에도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면서
창 5:1, 창 9:6, 약 3:9 를 근거로 든다.

말씀에 대해
자질이 거의 없다는 측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근거로 구속사역 범주 안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구속사(하나님의 계시를 이루어가시는 과정) 없이 인간자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창 5:1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관점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고 이해

창 9:6 무릇 사람이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 제물을 드린 후에 새 세상의 축복을 받은 후 하시는 말씀으로써 구속을 근거하는 말씀이라 생각

약 3:9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과거를 존중하고 있다고 말하고, 이 과거가 소망이 있는 것은 중보자를 통해서 있을 구속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남아 있지 않다는 쪽에서는
인간이 그의 자질적인 요소에 의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질적인 요소는 계속해서 타락한 쪽으로 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붙들어서 이끌어 주기 때문에 하나님께 붙잡혀 있다라고(유해무 '개혁교의학')말한다.
인간 자질은 하나님을 믿는 데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믿음의 유지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 자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정하면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하나님을 찾아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세미펠라기우스주의, 신인협동설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즉 천주교의 신학적 경향을 따를 위험성이 커진다.

플라톤, 공자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서 구원에 이른 사람들이다라고 생각될 수도 있기에
개혁주의에서는 이러한 경향성을 거부하여
인간의 고유자질을 하나님 형상에 포함시키는 것을 거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인 노력을 우리는 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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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현 목사님의 글 중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이 글을 통하여 후반부에는 박길현 목사님의 개인적인 이해와 평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개혁이란 것이 reformed 란 의미로 사도,선지자들의 가르침, 성경의 바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뜻인데 이것에 동조하지 않는 주의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1571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내세우며 개혁주의란 말이 쓰여지게 되었지만 사실 그 본래의 의미는 2세기 이레니우스가 영지주의를 반박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을 제시했었습니다. 
즉 성경적인 것과 반 성경적인 것과의 대립과 충돌이 역사속에서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안에서도 해석과 의견이 불일치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큰 그림으로 볼 때 개혁신앙이 옳다고 여겨질지라도 마치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나는 진리의 편에 서 있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착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 할 수 없고 주님의 뜻을 완전하게 헤아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진전성에 의미를 두고 각자의 삶의 방편속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있고 이해 되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억지로 해석할 필요도 난해한 구절만 찾아서 공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말씀을 읽고 배우고 깨닫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복음과 상황> 2004년 1월호에 게재된 글 중 일부입니다.

이광호 목사의 십일조관

특히 그의 글들에서 이광호 목사는 십일조가 율법주의의 측면에서 행해질 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교인은 십일조가 형식주의가 될 수 있고 기독교인의 재정사용에 대한 적절한 교훈이 될 수 없음도 언급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율법주의적으로 헌금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도 제기한다.

우리시대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른 의무조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하는 것이 의무완성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을 자랑삼을 일도 아닙니다.... 지금껏 처럼 앞으로도 십일조 생활에 충실하기를 바랍니다(얼큰이 선생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서).

현재의 십일조 제도는 한국교회의 특징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계에 흩어져 있는 건전한 교회들 가운데 십일조 연보를 제도로 정해두고 있는 교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화란이나 호주, 미국, 영국 등 서구에 있는 개혁교회들에서는 십일조 제도가 없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성실한 성도들은 십일조 연보를 열심히 하고 있는 우리 보다 훨씬 요긴하게 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적, 혹은 의무적이 아니어도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선교사들을 위해서 연보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한 연보에 힘을 쓰되 교회가 성도들로부터 모아진 돈을 잘못 사용하거든 교회에 십일조를 하지 말도록 당부합니다. 온 교인들이 십일조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자의 모습을 띠게 되면 달리 연보가 필요한 곳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개인이나 교회가 돈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면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돈의 능력을 경험하기 시작하여 성경이 경고 하는 바 돈을 따를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물질주의화 된 것은 결국 돈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부터 였습니다...십일조 연보를 할 때 의무적으로 하지말기를 바랍니다....연보를 하는 의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잘 사용하느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돈 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성도들의 연보가 어떻게 쓰이는가에 대한 선한 살핌은 훨씬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린 교인들은 돈만 내고 마는 쉬운 길을 택하려 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렵고 정 성도님의 힘이 필요하다면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가는 교회의 재정이 어렵다면 그 교회에 연보를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양쪽 모두 어렵다면 적절히 갈라서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쪽 다 부자처럼 되어 있다면 십일조를 양쪽 교회에 내지 말고 재정적으로 정말 어려운 참된 교회를 찾아서 내어도 될 것입니다(정** 성도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서).


음주문제에 대한 이광호 목사의 견해

성경을 통해 우리가 전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술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집사님에게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술 문제 때문에 신앙의 근본적인 것을 잘못되게 오해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술을 마시고 마시지 않고 하는 것이 마치 경건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건의 직접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성도라 하면서 술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올바른 신앙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술을 입에 대지 않지만 부정직한 행동을 하거나 남을 멸시하여 교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올바른 신앙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자가 훨씬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김 집사의 질의에 대한 답변 중에서).

주일성수에 대한 견해

우리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야 함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요일(Sunday)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법적인 규정 때문이라기 보다는 성경이 보여주는 직접적인 전통과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정** 학생에 대한 답변 중에서)...오늘날 주일성수를 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하심" 보다는 "자기 생각"이 기준이 되어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은 주일날 하루 종일 교회당에 가서 시간을 보내면 그것이 곧 주일 성수라 오해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넥타이를 맨 정장을 하고 교회의 각종 부서에서 어느 정도 책임을 가지고 분주하게 교회당에서 시간을 보냈으면 그것을 주일성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위 주의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자기인식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특히 목사나 장로 등 교회의 지도자들이 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밖에서 돈을 쓰지 않고 오락을 즐기지 않고 주일 하루 종일 교회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목사나 장로도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주일 오후에 공부를 하는 것과 운동을 하는 일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올바르고 분명한 신앙인들이냐 하는 점입니다...주일성수의 외형적 법칙을 규정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차적인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교회가 해야 할 우선적인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함으로써 말씀에 참여하는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각 성도들의 삶의 방편들이 모두 다른데 그런 것을 형식적으로만 획일적 법제화하여 요구한다면 그것 자체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김** 학생의 질문에 대하여)

불신자와의 결혼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

불신 결혼 자체가 권장할만 한 일이 아니며 그것을 자기합리화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만일 자제분이 그 처녀와 결혼을 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부 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무조건 반대하시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무조건 반대하게 되면 자제분은 물론 상대 처녀도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게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혼인을 하게 되면 한 평생 마음에 서운함을 간직하며 살아야할 부담을 가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제분이 악의나 나쁜 동기를 가지고 결혼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인격을 존중하는 가운데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 처녀를 구원의 반열에 세워두고 있을지 혹은 그녀를 통해 성도님의 가정에 대한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나그네님의 질문에 대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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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이광호 목사님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성도의 질문에 대한 답글을 보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아래는 발췌한 글의 전문입니다.
http://biblefactory.tistory.com/29

결론적으로 이광호 목사님은 2004년 본인이 몸담고 있는 교단으로부터 제명당했습니다.

십일조, 주일성수에 대한 견해가 교단의 규례에 어긋난다는 표면적 이유를 근거로 해서 이광호 목사님을 제명시켰습니다.

비록 해당 교단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다른 교단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10여 년이 흐른 지금 자신의 신앙관을 소신있고 용기있게 말할 수 있는 의인을 찾기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문제가 드러나지 않은 것 뿐입니다.
성경보다 세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2013년 5월 26일 일요일

잘못된 가르침의 뿌리인 '펠라기우스 주의'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합니다.

2천년의 교회 역사 동안 진리의 가르침과 잘못된 가르침은 수없이 충돌해 왔습니다.
성경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으로 교회를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바른 가르침에 서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으며 거듭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새 영을 부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의 구원 받아야만 하는가? 
천국 가기 위해서, 아니면 지옥 가지 않기 위해서?
박영선 목사님은 굳이 택일 하자면 지옥 가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래는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차임점에 대해서 웹상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가, 인간의 노력의 결과인가, 아니면 신인 협동적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구원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간의 논쟁에서 구체화 되었다. 영국에서 로마에 온 펠라기우스는 로마인들의 도덕적인 타락에 충격을 받고 일종의 윤리학적 교훈 집을 발간했다. 그는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삶에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은총론과 참회록에 나타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이에 따른 하나님의 은총과 절대주권에 대항하여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했다. 그는 아담의 죄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 한 사람에게 국한되었으며, 그의 자손들은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그의 주장은 인간의 죄의 원인이 아담의 원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의지로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의식적인 선행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인간의 죄의 원인과 자유의지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과 악에 대한 선택권을 동시에 주셨지만, 인간은 스스로 악을 택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아담의 원죄로 인류 전체가 완전 타락하게 되었고,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어거스틴은 AD 412년에 ‘죄의 보상과 용서에 대하여’ 그리고 ‘영과 율법’이란 책들에서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임을 피력했다. 어거스틴의 구원관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다. 어거스틴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은혜라고 말했다.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인간의 선행으로 인한 구원론에 대항하여 어거스틴의 구원론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이었다. 어거스틴은 구원을 받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만 있다고 강조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에 나타난 근본적인 차이점은 다음 도표와 같다.

          펠 라 기 우 스                                  어 거 스 틴  
원죄를 부인했다.                                아담을 통한 원죄설을 인정했다.
“아담의 죄는 아담에게 局限된다”.          "아담의 후손으로 원죄가 있다.”
인간의 죄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죄는 유전된다.
인간은 처음부터 죽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죄의 결과로 죽는다.
유아세례의 불 필요성을 주장했다.            유아세례를 인정했다.
인간은 자유의지을 보유하고 있다.        자유선택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항력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2000년 교회사 동안 계속 이루어 졌습니다.
일단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믿음만 강조하고 행함을 무시하는 방종주의 또는 안티노미안주의 입니다.
믿기만 하면 믿음의 고백이후 어떤 삶을 살더라도 심지어 죽을 때까지 방종 속에서 살더라도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잘못된 이단적 가르침입니다....

그 다음 행함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행함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즉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격상시키는 율법주의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성경과 일치하는 균형잡힌 가르침일까요?

첫째, 진실된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입니다. 구원을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가장 극명한 예가
바로 주님옆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입니다. 그는 전적으로 믿음과 그 믿음의 고백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둘째, 진실된 믿음이 자라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그 믿음은
반드시 선한 일을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즉 믿음은 행함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유적으로 말해서 10개월이 지나면 반드시 행함이라는 자녀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고백한 후에 그 믿음이 자라나기에 충분한 시간을 허락받은 사람은
반드시 행함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 선생이 말하는 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겁니다. 아기를 못낳는 죽은 태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십자가 상의 강도는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 이후 그의 믿음이 자라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믿음이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는 과정을 관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이 진실된 믿음 참된 믿음 살아있는 믿음이었기에 그 믿음 하나로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후에 상당한 시간을 허락받아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 속에서 행함의 열매, 선행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심각하게 우리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질문하고검토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참되고 살아있는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입술의 고백뿐인 죽은 믿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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