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트 신조(1618)
개혁교회의 교리 규범 중 하나는 도르트 신조인데, 이것은 소위 "반대자들에 대항하는 다섯 조항"이라고 불린다. 이 신경은 1618년부터 1619년에 걸친 도르트레히트의 개혁 종교회의(the Reformed Synod of Dordrecht)에서 교회로부터 채택되었다. 참으로 이 종교회의는 국제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 구성이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의 대표자들뿐만 아니라 국외의 27명의 대표자들이 함께 모였기 때문이다. 도르트레히트의 종교회의는 알미니안주의가 생겨나고 이것이 퍼짐에 따라 개혁교회 내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라이덴 대학의 교수였던 알미니우스(Arminius)는 다섯 가지의 중요한 점에서 개혁신앙으로부터 이탈하였다. 그는 예지에 근거한 조건적 선택, 무제한적 속죄, 부분적 타락, 저항할 수 있는 은혜 그리고 은혜로부터의 타락 가능성 등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종교 회의에 의해서 배척을 받고, 이와 반대되는 견해 즉 소위 도르트 신경, 또는 반대자들에 대항하는 다섯 조항이라고 불리는 입장이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이 종교 회의에서는 다섯 가지 면에서, 즉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전적 타락,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 등을 개혁교리로서 확증시켰던 것이다
이 신경은 각각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는데, 전자는 그 주제에 관한 개혁신앙의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요, 후자는 이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의 잘못을 지적하여 이를 배격하는 것이다. 비록 그 형태에 있어서는 3장과 4장이 하나로 되어 단지 4장에 걸쳐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다섯 개의 신경이라고 부르는데, 제3장은 3장과 4장으로 보충 분류되어 있다. 교회의 모든 책임자는 신앙고백(Confession of Faith)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뿐만 아니라 이 도르트 신경에도 반드시 서명하도록 되어 있다.
첫째 교리: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
제 1 장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 하여 저주 아래 놓여 있으며, 영원한 죽음을 받기에 마땅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둔 채 멸망 받아 죄 값으로 형벌을 받도록 하실 수도 있는 분이신데, 이는 사도의 다음의 말과 같은 것이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3:1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제 2 장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요 3:16).
제 3 장
인간이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이 복음을 주시는데, 이 사역을 위하여 사람들이 부름을 받아 회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15).
제 4 장
하나님의 진노는 이 복음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임한다. 그러나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이 복음을 받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시키심에서 구원을 받고 그들에게 주어진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제 5 장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이 불신앙의 원인과 그 죄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신에게 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그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로서, 다음의 말씀과 같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빌 1:29).
제 6 장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의 선물을 받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결정)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행 15:18). “모든 일을 그 마음이 완고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택한 자로 하여금 마음 문을 열게 하여 믿도록 하시며, 반면에 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사악함과 고집대로 내버려 두사 심판을 받게 하신다. 다 멸망 받기에 마땅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자비롭고 의로우신 택함과 유기의 작정이 있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대로 사악하고 범죄 하여 요동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멸망 가운데 빠지게 하지만 거룩하고 경건한 영혼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로 도우시는 것이다.
제 7 장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 영원부터 중보자로 또한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서 세우신 그 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라 은혜로 인하여 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이 되었다. 택함 받은 자들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그 밖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값어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똑같은 비참한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를 통하여 택함 받는 자들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말씀과 성령으로 그 분과 교통하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참 믿음을 주시어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또한 그 아들과의 교제를 통해 능력 있게 그들을 보존해 주시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자비로우심에 영광을 돌리고 그의 풍성한 은혜를 찬양케 하신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제 8 장
이 선택에는 다양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에게 관한 하나의 동일한 작정이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구약과 신약에 기초하고 있다. 이 성경에는 영원 전부터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기쁘긴 뜻과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그 영광을 노래하게 하였다. 또한 구원과 구원의 길을 찬양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길에서 살아가도록 부르셨음을 보여주고 있다(엡 1:4-5, 2:10).
제 9 장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것은 그 선택의 선행 조건이나 원인 등으로서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예지적인 믿음이나 그 믿음에 대한 순종, 거룩함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착한 성품이나 기질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선택을 받아서 믿음에 이르고 그 믿음에 순종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등의 순서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모든 선행의 기초(원인)를 이루게 되는 것이며, 선택받음으로 인하여 믿음과 거룩함과 그 밖의 구원의 은사를 얻게 되어 결국은 그 열매로서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하셨다는 사도의 말과 같다.
제 10 장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 은혜로운 선택의 유일한 원인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구원의 조건을 세우신 것은 인간의 어떤 능력이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범죄한 모든 사람들 중에서 기꺼이 얼마를 뽑아서 자기에게 속한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인데 이는 기록된 다음의 말씀과 같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제 11 장
하나님은 가장 지혜로우시며 불변하시며 전지(全知)하시며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므로 그가 행하신 선택은 중단되거나 변하거나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다. 또한 택함 받은 자는 버림받거나 그 수가 감소될 수도 없는 것이다.
제 12 장
구원의 확신에 대한 정도와 그 방법은 다양할 수 있긴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불변한 택정함의 확신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오묘한 일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바 구원받는 자의 확실한 열매를 잘 지켜 나감으로 이루어진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과 충성스런 경외심, 죄에 대한 거룩한 탄식, 그리고 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과 갈증 등이다.
제 13 장
이 선택을 잘 깨닫고 확신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의 깊은 자비로우심을 경외하며,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자비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뜨거운 사랑에 감사하게 된다. 또한 이 선택의 교리를 이해할 때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킴으로써 나태한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며 세속적인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지만 선택받은 자로의 행위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이 구원의 은혜를 가볍게 여겨서 제멋대로 게으른 행위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이 있게 된다.
제 14 장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 인한 이 선택의 가르침이 선지자들과 그리스도 자신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서 선포된다. 또한 구약과 신약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보여졌듯이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에서 시간과 장소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일이 진지하고 경건한 가운데에서 특별히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그 거룩한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높으신 하나님의 비밀스런 길을 완전히 깨달아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북돋우고 위로해 주시기 위하여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제 15 장
특별히 우리에게 설명이 요구되는 것은 이 영원하고도 값없이 주신 은혜로운 택하심에 관해서 이다. 이는 거룩한 성경에 나타난 증거로서, 모든 인간이 택함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중 얼마가 택함을 받았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자비로우신 그 불변하는 사랑에서 제외되어 스스로 파멸에 빠져 구원의 믿음과 회개하는 은총을 받지 못한 채, 그들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여 끝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이는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지은 모든 죄악으로 인한 결과이다. 이것이 징벌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인데, 이것으로 인하여 결코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요(이런 생각은 가장 불평스런 태도인데) 다만 하나님께서는 무섭고 맹렬하신 의로운 재판자시오 보응자이심을 선언해 줄 뿐이다.
제 16 장
그리스도 안에서 산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화평한 마음과 충성스런 순종을 따라 부지런히 노력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적극적이지는 못하나 택한 자들 속에서 은혜로 역사하도록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이 방법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버림받을까 하는 공포심이나 또는 그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이를 행하되 풍성한 은혜를 기다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비록 그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돌아와서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고 사망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거룩함과 온전한 신앙에 이르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가르침이 그들을 공포로 몰아 넣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조차 꺽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이 유기의 가르침은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무관심하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오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이 세상과 육체의 쾌락에 방임해 두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형벌이 있음을 가르칠 뿐이다.
제 17 장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말씀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자녀는 그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운 계약으로 인하여 그 부모의 믿음을 따라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이 거룩한 믿음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도록 하기 위해 자녀들이 택함 받아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창 17:7; 행 2:39; 고전 7:14).
제 18 장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엄한 유기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대답할 수 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9:20).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20:15). 또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오묘하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잘못된 주장을 배격함
선택과 유기에 관하여 지금까지 잘 설명했으므로, 종교 회의에서는 다음의 잘못된 주장들을 배격하는 바이다.
제 1 절
주장 : 믿고자 하고 이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전체적이므로 이 선택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할 뿐, 그 외의 다른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을 명백히 부인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믿는 자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영원 전부터 특정한 수를 택하여 뽑으셔서 때가 이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얻게 하시고 인내를 갖게 하신다고 말씀하였다. 이것은 다음의 말씀과 같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제 2 절
주장 :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일반적이며 불명확한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특별하고 분명한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불완전하고 취소될 수 있으며 미결정적이고 조건적이든지, 또는 완전하고 취소될 수 없으며 결정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는 믿음에 이르는 택함이요 또 다른 하나는 구원에 이르는 택함이므로, 구원에 이르는 결정적인 선택이 아니고서도 이 선택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무관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상상일 뿐이므로 선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그릇되게 하여 구원의 보배로운 줄을 끊어버리는 결과가 될 뿐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제 3 절
주장 : 성경이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그 기쁘신 뜻대로 택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뽑으셨다고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가능한 조건들로부터(이 중에는 율법의 행위들이 포함되는데) 또는 모든 사물의 질서로부터 믿음의 행위를 주셨다는 뜻이다. 이는 원래부터 구원의 조건으로서는 불완전한 순종일 뿐만 아니라 아무런 값어치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은혜로써 이것을 완전한 순종으로 여기셔서 영생을 얻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신다.
바로 이러한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되어, 인간은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바 은혜로써 주신 칭의와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될 뿐이다. 그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도의 교훈을 볼 때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제 4 절
주장 : 믿음에 이르도록 선택을 받는 조건에 있어서는 먼저 인간은 영생을 얻는데 합당한 올바른 본성을 가지며 경건과 겸손과 온유한 성품을 가져야 하는데, 마치 선택은 이러한 성품들에 의존해 있는 것과 같다.
펠라기우스(Pelagius)의 이러한 주장은 사도의 다음의 말씀과 반대되는 것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3-9)
제 5 절
주장 :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불완전하고 비결정적인 상태로 택함을 받았다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예지된 믿음과 회심, 거룩함, 경건한 등의 생활 등을 이미 시작했거나 얼마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결정적인 선택은 믿음과 회심 그리고 거룩함과 경건함에 끝가지 이르도록 하는 견인(인내심)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은혜롭고 복음적인 가치가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택함 받은 자가 택함 받지 못한 자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과 이 믿음에의 순종 그리고 거룩함과 경건함 또한 성도의 견인 등은 영광에 이르게 하는 불변하는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선행(先行)으로서 요구되는 조건이다. 그런데 이 조건은 완전히 선택될 사람들에게 보여질 일이며, 이러한 요소(조건)가 없다면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선택은 일어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인데, 성경은 변함없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세게 하려 하사”(롬 9:11).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롬 1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 4:10).
제 6 절
주장 :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불변하는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작정에도 불구하고 택함 받은 사람들 중의 얼마는 여전히 멸망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그러하다.
이 엄청난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변덕스러운 분으로 묘사되며 은혜로 택정함을 받은 성도의 위로가 무너지려고 한다. 또한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 6:39).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제 7 절
주장 : 세상의 삶에 있어서는 영광에 이르도록 변함없이 선택받은 자의 열매나 자각(自覺)이 없으며, 더욱이 이에 대한 확실성도 없고 다만 가변적이며 불명확한 조건이 있을 따름이다.
불확실한 확실성이라고 말하는 자체도 우스꽝스러운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 체험에도 위배되는데, 성도들은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구원받은 사실을 기뻐하시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엡 1장).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고 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도 악마의 사악한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성도들을 향하여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 8:33)라고 외쳤던 것이다.
제 8 절
주장 : 하나님은 오로지 그의 의로우신 뜻에 따라서 그 누구도 아담의 타락에 빠져 죄의 상태에 놓임으로 저주를 받게 하지도 않으셨고(보편구원=만인구원론) 또한 믿음과 회심에 필요한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사귐에서 벗어나도록 하지도 않으셨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천지의 주제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다”(마 11:25-26).
제 9 절
주장 :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복음을 주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주시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보다는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낫고 가치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볼 때 위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14-15).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비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라”(마 11:21).
둘째 교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인간의 구속
제 1 장
하나님은 가장 자비로우시며 공의로운 분이시다. 그의 공의로우심은(그의 말씀 안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셨듯이) 그의 무한한 엄위에 어긋난 우리의 죄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요구하신다. 즉 우리의 육과 영혼에 있어서 일시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징벌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가가 이뤄지지 않는 한 이 징벌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제 2 장
따라서 우리 인간 자신 속에서 보상을 만드는 것과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해보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보증으로 주심으로 그의 놀라운 자비를 기꺼이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담당하시고 저주받은바 되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보상으로 희생되었다.
제 3 장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은 유일하며 가장 완전한 희생이며 죄에 대한 보상이요 온 세상의 죄를 충분히 보상할 수 있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죽음이다.
제 4 장
이 죽음이 무한한 가치와 존엄이 있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내놓으신 그 분은 온전한 거룩함을 가지신 실제의 인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시오 성부와 성령과 함께 동일하게 영원하며 무한한 본질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본질이 우리를 위한 구세주로서의 필수적인 자격을 갖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바로 이 분의 거룩함이 죄로 인하여 우리가 당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 5 장
더욱이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주신 이 약속은 누구에나 똑같이 온 세계에 선포되고 알려져야 하며,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뜻대로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제 6 장
복음에 의하여 부름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회개도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불신앙 가운데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드려진 희생이 모자라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는 것이다.
제 7 장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진실하게 믿음으로 죄와 파멸에서 구원받게 된 것은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요 결코 그들의 어떠한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제 8 장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아들의 보배로운 죽으심으로 인하여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이 생명을 얻어 구원받도록 하는 하나님의 가장 은혜로운 뜻과 목적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자들에게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이 선물을 주신 것은 그들에게 완전한 구원을 이뤄주시기 위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피 흘리심으로 새 언약을 확증하셔서 모든 사람과 족속과 민족, 즉 영원 전부터 구원에 이르도록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구원토록 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있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구원의 능력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들을 속량해 주셨다. 따라서 믿기 전과 후에 지은 모든 죄악들을 그것이 원죄이든 실제적인 죄이든 간에 깨끗케 해주시며, 세상 끝날 까지 점이나 흠 없이 신실하게 보존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그 영광을 즐거워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제 9 장
택함 받은 자에게 이 영원한 사랑을 베푸신 뜻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루어져 왔으며 그 모든 사람의 권세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되어갈 것이다. 따라서 정한 시간이 이르면 택함 받은 성도는 한 곳에 모이게 될 것이며, 그 곳에는 성도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피로 그 기초를 이루는 교회로 충만할 것이다. 그 곳에서는 변함없는 사랑과 주님을 구세주로(이 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신 분으로 믿는 자의 신랑이 되시는데) 섬기는 성도들이 모여서 영원히 그의 영광을 찬미할 것이다.
잘못된 주장을 배격함
올바른 교리가 지금까지 설명되었으므로 종교 회의에서는 다음의 잘못된 주장들을 배격하는 바이다.
제 1 절
주장 :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세우신 것은 누구를 구원토록 하기 위한 분명한 계획 없이 되어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일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은 구원이 실제로 어떤 사람에게 적용된 적이 결코 없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공로의 필연성과 유익성과 그 가치는 그대로 존속할 수 있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경멸하는 입장이요 성경과 모순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저희를 알며”(요 10:15, 27). 또한 이사야 선지자도 구세주에 과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따라서 위의 주장은 온 기독교회가 믿는 바 신앙의 내용에 어긋나는 것이다.
제 2 절
주장 :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은 그의 보혈을 통하여 새로운 은혜 계약을 이루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죽으심으로 인간과 함께 계약을 세우시기 위한 단순한 권리를 아버지를 위하여 얻으심으로 은혜로든지 또는 행위로든지 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히 7:22, 9:15,17).
제 3 절
주장 :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인간을 위한 구원이나 믿음을 얻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에 의하여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효과를 줄 뿐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성부를 위하여 인간에게 다시 권위와 완전한 의지의 관계를 세우셨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조건을 제시해 주심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지만 이 조건에 순종함으로써 이를 만족시키든지, 또는 거부함으로 파기하든지에 대한 관계를 세우신 것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여지없이 멸시하는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얻게 되는 가장 중요한 열매나 유익됨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다시 한번 펠라기우스의 엄청난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 4 절
주장 :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중보를 통하여 인간과 맺은 새로운 은혜 계약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임으로써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 받으며 구원 얻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시는데 믿음 그 자체와 믿음의 순종이라는 것을-비록 불완전하긴 하지만-율법의 완전한 순종으로 여기셔서, 은혜를 통하여 영생을 얻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신다.
이 주장은 성경과 모순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4-25). 위의 주장은 온 교회가 가르치는 교훈의 내용과 어긋나는 것이며, 마치 그릇된 소시누스(Socinus)의 가르침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 문제에 있어서 전혀 잘못된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제 5 절
주장 :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은혜계약에 들어감으로써 그 누구도 원죄로 인한 저주를 받지 않기에 충분한데, 이것은 원죄로 인해 저주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원죄의 죄의식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주장도 성경이 가르치는 바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 2:3)이라는 면과 어긋나는 것이다.
제 6 절
주장 :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공로를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유익을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주셨다. 비록 어떤 사람들이 죄 사함과 영생을 얻은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그들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예외 없이 누구에나 주어진 은혜일 뿐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 그들 속에 역사하는 어떤 특별한 자비를 입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잘 선용했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주장이 건전한 생각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괴적인 독소를 주고자 하는 펠라기우스의 오류에 기인한 것이다.
제 7 절
주장 :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사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위해서 죽을 수도 없었고 죽으실 필요도 없었으며 더욱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도의 가르침과 받대된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롬 8:33-34). 또한 주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2-13).
셋째와 넷째 교리: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께의 회심, 그리고 회심 후의 태도
제 1 장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그를 지으신 이에 대한 참된 구원의 지식과 영적인 일들에 관한 추구가 있었다. 즉 그의 마음과 의지는 의롭고 순결했으며 전인격은 성결했었다. 그러나 인간은 사단은 유혹과 자유 의지로 인해 하나님을 거역하여 이 특별한 은사들을 빼앗겼으며, 그로 인해 사악한 마음과 비참한 어두움과 헛됨과 잘못된 판단력을 가지고 악하고 불순종하며 마음과 의지는 완악해지고 감정이 불결해져 버린 것이었다.
제 2 장
인간은 타락한 후에 자녀를 낳았고 타락한 조상에게서 또한 타락한 후손들이 나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제외하고서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죄를 지니고 태어났다. 이것은 마치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듯이 하나의 모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으로 보건대 사악한 본성이 유전된 것이다.
제 3 장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 속에서 잉태되어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선행을 할 수 없고 죄악에 빠져서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령의 중생하는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께로 올 수도 없고 하나님께로 오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 죄악에서 새롭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제 4 장
그러나 인간에게는 타락한 후에도 희미한 자연의 빛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에 관하여, 자연의 사물에 관하여 그리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문제에 과하여 약간의 지식이 있음으로 외부적인 행위를 통하여 도덕과 선에 관한 행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연의 빛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상태에서 하나님에 관한 구원의 지식에로, 또한 참 회심에로 이끌어가게는 하지만, 이 자연의 사물 속에서 올바르게 사용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갖가지 면에서 이 빛을 전적으로 오염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결코 변명할 수 없는 행위를 통하여 불의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제 5 장
이와 동일한 빛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선별된 유대인 모세에게 내려주신 십계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록 이 십계명이 죄의 비참함으로부터 인간을 치유하거나 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제시하지 않지만, 죄의 심각성과 그 죄악 속의 인간을 보여줌으로써 육신의 연약함으로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은 이 율법만 가지고는 도저히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제 6 장
그러므로 자연의 빛이나 율법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화목의 말씀 내지 화목의 사역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써 행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은 메시아에 관한 기쁜 소식이며, 구약이나 신약 아래 있는 어느 누구든지 이 소식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기꺼이 구원하셨다.
제 7 장
하나님께서 그의 비밀스러운 뜻을 구약 시대에는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계시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여러 민족들 간의 구별이 없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계시되어 있다. 이 구별은 어느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거나 이 자연의 빛을 더욱 잘 사용해서도 아니요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과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할 따름이다. 따라서 반역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사랑으로 돌보심을 받은 그들은 겸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또한 사랑의 사도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되,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의심하여 낮추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제 8 장
진실하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복음에 의해 부름 받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받으실 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그 말씀 안에서 참되고 진실하게 선언하셨는데, 즉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는 그에게로 나와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혼의 안식과 영생을 분명히 약속해 주셨다.
제 9 장
말씀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복음이 잘못되고 그리스도께서 부족하시고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사가 잘못되어서가 아니고 그 인간 자체에 잘못이 있다. 부름을 받았을 때에 어떤 이는 급박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말씀을 거부하며, 또 어떤 이들은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을 당할 때는 곧 넘어지고, 다른 이들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르쳐 주셨다(마 13장).
제 10 장
그러나 복음에 의한 부름에 순종하여 돌이킨 사람들은 그것의 원인이 자유 의지를 잘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돌이킴이 믿음과 회심에 필요한 은혜를 스스로 이룬 것으로 생각하여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려는 (마치 펠라기우스의 이단들이 교만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잘못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모든 원인은 오직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신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매 그들을 부르시고 믿음을 주셔서 돌이키게 하심으로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해 주시고 하늘나라와 연결해 주셨다. 이것은 놀라운 빛으로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해 주시고 하늘나라와 연결해 주셨다. 이것은 놀라운 빛으로 어두움의 권세에서 인도해 내주신 하나님을 찬양케 하며, 성경 여러 곳에서 사도들이 증거하는 대로 오직 주님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제 11 장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 속에서 기쁘신 선을 이루시며 참 회개를 이루실 때 그들에게 외적으로 복음이 선포되도록 하여 성령으로 강하게 역사하사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이해하며 분별토록 하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하는 영으로서 사람의 깊은 곳에까지 임하셔서 닫힌 마음을 열게 하시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마음의 할례를 이루시며 죽었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악하고 불순종하고 완악한 마음을 선하게 순종하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힘과 능력을 주셔서 마치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제 12 장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사 새로운 모습으로 만드시되 죽음에서 부활의 새 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은 성경에서 강조하는 중생케 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복음을 외침으로나 도덕적 권면으로, 또는(물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 후에 인간 편에서는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수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이고 가장 능력 있으며 동시에 가장 기쁘고 놀라우며 신비스럽고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듯이 이 중생의 능력은 창조나 죽음에서의 부활 등에 못지않게 놀라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이 놀라운 일은 분명하고 정확하며 효과적으로 중생케 함으로 실제적인 믿음을 얻게 하는 것이다. 또한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뤄지고 효력을 낼뿐만 아니라 이 효력의 결과는 그 자체로 활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받은 은혜로 인하여 믿고 회개함에 이른다고 말함이 옳은 것이다.
제 13 장
신자들에게 성령의 사역의 움직임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해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일이 신자로 하여금 구세주를 믿고 사랑하도록 하기에는 충분하다.
제 14 장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자기의 뜻을 따라 받거나 거부할 수도 있는 하나님께서 제시한 정도의 것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 오히려 이 믿음은 인간에게 내려진 것이요, 인간으로 하여금 받아들이며 영접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믿게 할 능력이나 힘을 제시해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의지를 정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뜻이나 행위에 있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서 모든 사역을 이루시듯이 믿을 의지도 주시고 믿게 되는 행위 역시 주신다는 것이다.
제 15 장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인간에게 주실 때에 그 어떤 책임이 있으신 것은 아니다. 보상에 대한 기초로서의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어찌 빚지실 수가 있는가? 죄와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의무감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영원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이 마땅한 것이다. 이 은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이 영적인 선물과는 관계없이 그 스스로의 상태에 만족하든지 도는 위급함을 못 느낀 채 영생의 선물이 아닌 세상의 소유물로 헛된 자랑을 하게 되든지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입으로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변화된 삶을 사는 성도들에 관하여 우리는 사도들의 본을 받아서 가장 훌륭한 태도로 그들을 판단하고 그들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마음의 깊은 비밀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하는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가 남보다 유별난 것처럼 교만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 16 장
그러나 인간이 타락은 했지만 이성과 의지를 부여받은 피조물임에는 변함이 없으며, 또한 인류에게 번진 죄악이 인간의 본성조차 빼앗아간 것은 아니고 파멸과 영적인 죽음을 초래한 것뿐이다. 이처럼 이 중생의 은혜는 인간을 무감각한 사물로 여기거나 인간의 의지나 그 본성조차 모두 무시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적으로 소생키 시고 치료하며 바르게 해주고, 동시에 그 은혜에 힘있게 따르도록 해주며, 전에는 역적인 반역과 저항이 가득 찬 곳에 기꺼이 신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참되고 영적인 의지로는 이 타락에서 재생할 아무런 소망도 얻지 못하고 죄에 빠져 들어갈 뿐이다.
제 17 장
우리에게 생을 불어넣어 주시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인도하심에는 무한한 자비와 선하심으로 택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그의 가르침의 길이 있는데, 중생케 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은 복음(말씀)을 통해 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중생케 하는 씨앗으로, 또한 영혼의 양식으로 정해 주신 것이다. 이 말씀을 따르는 사도들과 선생들이 하나님의 이 은혜에 관하여 가르치되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인간의 교만을 없애도록 교훈하고, 또한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한 이에게는 거룩한 복음의 훈계를 따라 성례를 지켜나가고 교회의 가르침을 준수하도록 명한 것과 같이 오늘날도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은 그의 선하신 기쁨을 따라 인간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을 시험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란 교훈을 통해 내려지기 때문이며 우리가 의무를 기꺼이 수행하면 할수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더 분명해져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더욱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원의 열매와 효력에 있어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영원토록 있어야 할 것이다.
잘못된 주장을 배격함
지금까지 참된 교리가 설명되었으므로 종교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잘못된 주장을 배격하는 바이다.
제 1 절
주장 : 원죄가 그 자체에 있어서 온 인류를 정죄하고 일시적이며 영원한 형벌을 받기에 족하다고 말함은 옳지 못하다.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도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롬 5:16).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제 2 절
주장 : 선과 거룩 그리고 의와 같은 영적인 은사 또는 선한 성품이나 덕 등은 인간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에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도 아니고 타락한 이후에 없어진 것도 아니다.
이 주장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24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묘사와 어긋나는 것이다. 거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이 의와 거룩함이라고 했는데, 이는 분명히 의지에 속한 것이다.
제 3 절
주장 : 영적인 사망에 있어서 영적 은사들은 인간의 의지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의지는 그 자체에 있어서 결코 부패된 것이 아니요 다만 깨달음이 어두워졌고 마음이 둔화됨으로 의지가 방해를 받았을 뿐이다. 이 방해된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인간의 의지는 그 본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의지 그 자체로서, 원함으로 선택하든지 원치 않음으로 버릴 수 있든지 등의 온갖 선한 행위를 보일 수 있다.
이것은 다음의 선지자의 말과 모순되는 이상한 주장으로서 자유 의지의 능력을 지나치게 높이고자 하는 잘못된 주장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또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불순종하는 가운데에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엡 2:3).
제 4 절
주장 : 중생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실상은 죄 가운데서 죽은 것이 아니요, 영적인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의로운 삶에 굶주리고 목말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통회하는 상한 심령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증거와 모순되는 것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엡 2:1). “허물로 죽은 우리를”(엡 2:5).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더 나아가 이 비참함에서 벗어나 생명에의 굶주림과 갈증을 느끼며 상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중생함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축복받은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다(시 51:17; 마 5:6).
제 5 절
주장 : 타락한 자연인이라 할지라도 일반 은총(이 일반 은총으로 그들은 자연의 빛을 이해하는 것인데)을 잘 사용할 수가 있으며, 또는 타락 후에라도 이 은총은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것을 점점 더 잘 사용함으로써 구원의 은혜, 즉 구원 그 자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하실 준비가 다 되어 있음을 보이시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회심에 필요한 모든 방책을 충분히 그리고 효과있게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주장은 지금까지의 많은 사람들의 체험에 비춰 볼 때, 또한 성경이 증거하는 것을 볼 때 사실이 아님이 나타난다.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다 할렐루야”(시 147:19-20),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행 14:1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제 6 절
주장 : 인간이 참 회심을 하는 데에는 그 어떤 자질이나 능력과 은사가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의 의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회개하여 신자라고 불리게 된 이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하여 받아들인 자질이나 은사가 아니라 다만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 이 믿음에 따라 얻게 되는 능력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 믿음이란 어떤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주장은 성경의 말씀과 모순되는데,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의 새로운 자질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마음을 인간의 마음속에 넣어주셨다고 선언한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 31:33). “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사 44:3).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또한 위의 주장은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라고 외친 선지자의 기도와 같이, 교회의 지금까지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다.
제 7 절
주장 : 우리가 하나님께로 회심할 수 있었던 바의 이 은혜란 일종의 부드러운 충고요, (다른 말로 하면) 회심하는 사람 속에서 움직이는 가장 고상한 태도요, (충고에 포함되는데) 인간의 본성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다. 따라서 왜 이러한 충고의 은혜가 자연 상태의 인간을 영적인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할 수 없었는가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충고의 태도를 통한다는 것 이외에는 인간의 의지에 동의를 구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다. 사단의 일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능력은, 사단이 일시적인 것을 보여주는 반면에 영원한 것을 약속해 주셨다는 데 있다.
위의 내용은 모두가 펠라기우스파의 주장이요 성경과 모순되는 것인데, 마치 에스겔서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회심 속에서 나타난 성령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 있는 모습과 거리가 먼 것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제 8 절
주장 :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가 신앙과 회심 쪽으로 향하도록 그를 중생하게 하는 데 있어서 그의 무한한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은혜의 사역을 다 이루신 후에라도 인간은 하나님과 성령에 저항할 수 있는데, 이때에도 하나님은 인간이 중생하기를 바라며 그를 중생시키고자 하신다. 따라서 인간이 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완전히 중생치 않게 될 수도 있는데, 인간의 중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은 인간의 회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충족성을 부인하는 것이요, 전능한 하나님의 사역을 인간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한 사도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엡 1:19). “……우리 하나님이……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3).
제 9 절
주장 : 은혜와 자유 의지는 회심하는 데 필요한 부분적인 요소가 되는데, 회심의 과정을 볼 때 은혜는 자유 의지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 의지가 작용하여 결정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는 이 자유 의지를 돕기에 충분하도록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오래 전에, 교회는 다음과 같은 사도의 가르침을 좇아서 이런 펠라기우스의 교리를 정죄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니라”(롬 9:16).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다섯 번째 교리: 성도의 견인(堅忍)
제 1 장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하며 성령으로 새롭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비록 육체의 범죄와 육체의 언약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 했다 할지라도 죄의 지배와 그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다.
제 2 장
인간이 불완전함으로 범하는 날마다의 죄와 결점은 성도로서의 최선의 일을 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죄와 결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을 낮추게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만 의지하도록 만드는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으로 기도하며 경건을 연습함으로써 더욱더 육체를 제어하고 완전한 목적을 향하여 나감으로 마지막에 이 육체의 죽음에서 구원받아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어린양과 함께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제 3 장
이 죄에 거하는 성도들, 또한 이 세상의 사단의 유혹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사실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이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 끝까지 자비로 지켜주시고 능력으로 보존해 주신다.
제 4 장
믿는 자들을 은혜 속에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연약한 인간이 거스릴 수는 없으나 회심한 이후에라도 육신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성령 안에 항상 거하지는 못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죄에 빠져 육체의 정욕에 유혹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을 게을리 할 때 성도라도 육신적인 이 세상의 사단의 크고 무서운 죄에 빠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실제로 이 죄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과 베드로와 그 외의 다른 성도들이 연약함으로 인하여 타락에 빠진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제 5 장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께 심히 거스리는 죄를 범함으로써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고 믿음의 사역을 방해하며 그들의 양심을 파괴하는 일이 생기고 잠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기도 하는데, 이럴 때에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그 길에서 돌아서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빛이 그들에게 다시 임하게 된다.
제 6 장
하지만 변함없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기초한 그의 풍성하신 은혜는 비록 성도들이 심각한 죄에 빠져 있을 때라도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은혜를 잃음으로 의인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고통 가운데 방치해 두거나, 성령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며 전적으로 타락되어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하시지도 않으신다.
제 7 장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멸망에 빠져 있는 이 세상 중에서도 결코 썩지 않는 마음의 씨를 보존해 주신다. 다시 말해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들이 회개하여 새롭게 되고,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마음속에 탄식하도록 함으로 중보자의 보혈로 죄 사함을 얻고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믿음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며 두려운 마음과 수고로써 그들 자신의 구원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역사하신다.
제 8 장
그러므로 믿음과 은혜에서 전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며 범죄로 인한 멸망에서 우리가 구원된 것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다. 비록 인간은 실수하여 범죄함으로 마음속에 결심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거나 실패하지 않으며 그 약속이 취소되는 일이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도고의 기도 그리고 성도를 보호해 주시는 그 모든 것은 성령의 인치심으로 되는 일이므로 결코 좌절하거나 무효화되는 일이 없다.
제 9 장
참된 신자들은 그들이 지닌 믿음의 정도에 따라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심과 믿음으로 성도를 보존해 주심에 대한 확신을 갖는데, 이 확신을 따라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교회의 참 지체가 되며 앞으로도 계속 지체가 된다는 사실과 죄 사함을 얻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다.
제 10 장
그러나 이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해 주는 것과 어긋나는 그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위로가 되시는 그 계시된 말씀, 즉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의 믿음으로만 이뤄지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기업이 된다고 말하는 성령의 증거로서 되는 것이다(롬 8:16). 또한 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양심을 가짐으로 선한 일을 이루도록 하신다. 만일 하나님의 대한 약속을 소유하지 못할 때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제 11 장
성경이 증거 하는 바는 신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여러 가지 육신적인 의심으로 마음의 갈등을 갖게 되며 심한 유혹으로 믿음과 성도의 견인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로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성도를 견인토록 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고 다만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전 10:13).
제 12 장
그러나 성도를 인내하도록 하신다는 이 확신은 교만한 마음으로 이 세상의 안일함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겸손한 마음과 충성심, 참된 경건함과 모든 시험 중에서의 참음, 그리고 뜨거운 기도와 인내심 그리고 진리를 고백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를 인내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선한 일을 행함으로 이 은혜에 보답해야 마땅한데, 이는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며 성도들이 체험한 신앙이었던 것이다.
제 13 장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내하게 하신다는 이 확신은, 죄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함을 무시하고 세상적으로 나가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서 정하신 길 안에서 조심스런 마음을 계속 가져서 그 길로 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 사랑을 남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고 따라서 양심이 고통을 받는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제 14 장
복음을 외침으로 하나님을 기뻐시게 했던 것같이 우리 속에서 이 은혜가 역사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보존해 주시되 그 말씀을 듣고, 보고, 묵상하며 또한 이 말씀에 의하여 권면하고 책망하며, 그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여 성례를 행하게 하심으로 그의 성도들을 지켜 주시는 것이다(견인의 방식).
제 15 장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에 관한 이 교리와 계시된 말씀 속에서 충분히 나타난 확신성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만 자신의 이름의 영광과 성도를 향하신 위로를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를 미워하고 이 세상도 이를 조롱하며,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 이를 남용하고 이단들도 이를 적대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은 날마다 이 사랑을 갖고 마치 놀라운 보배를 가졌듯이 이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 까지 성도를 보호해 주실 것이요 따라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께만 영원토록 영광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멘.
잘못된 주장을 배격함
지금까지 올바른 교리가 설명되었으므로 종교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잘못된 주장을 배격하는 바이다.
제 1 절
주장 : 진실한 성도들의 견인은 택함 받음의 결실도 아니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얻어진 하나님의 선물도 아니요 다만 새 언약의 조건일 뿐인데, 이는(마치 그들이 주장하듯이) 자기의 결정적인 선택과 의로움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하여 이 조건을 채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는 달리 성경은 성도의 견인은 택함 받은 데에서 나오는 것임을 증거하며 택함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그의 중보 되심으로 인하여 이 성도의 견인을 받는 것이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 11:7).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한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2-35).
제 2 절
주장 :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인내할 수 있도록 충분한 힘을 공급해 주시는데 이것은 성도들이 그 의무를 이행할 때에 되는 것이요, 비록 성도들이 인내하기에 충분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셨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도들이 인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좌우될 뿐이다.
이것은 펠라기우스의 생각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려고 하는 듯한 생각이기는 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는 잘못된 주장인데,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모든 감사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돌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고전 1:8)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제 3 절
주장 : 참 신자요 중생한 사람일지라도 의롭다 하는 믿음에서 떨어져 은혜와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구원에서 벗어나 영원히 버림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칭의, 중생함,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계속하여 보급해 주시는 이 모든 사실을 무효화시키는 그릇된 주장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과 모순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또한 사도 요한의 다음의 말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났음이라”(요일 3: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제 4 절
주장 : 참 신자요 중생한 사람일지라도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을 수 있으며 성령을 거스리는 죄를 범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인 요한일서 5:16-17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말한 후에 계속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제 5 절
주장 : 우리는 특별한 계시가 없이는 이 세상에서 미래에 있을 성도의 견인에 대한 아무런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위의 주장은 참 신자들이 가지는 확실한 위로를 이 세상에서 빼앗아가며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신앙이 교회 안에 다시 침투해 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의 확신을 그 어떤 특별하고 비정상적인 계시에서 찾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임하는 성령의 증거에서, 또한 하나님의 일관된 약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또한 요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제 6 절
주장 : 성도의 견인이나 구원에 관한 확신은 그 본성을 따져보면 나태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거룩함이나 선한 행동, 또는 그 밖의 다른 경건한 행위를 하는 데 방해할 뿐이요, 오히려 그러한 확신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위의 주장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내재하는 성령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사도 요한의 첫 번째 서신에서의 다음의 말과 모순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또한 이들의 주장은 신약과 구약에 나오는 성도들의 생애와도 모순되는데, 신·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의 인내와 구원에 관하여 확신을 가졌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기도하며 경건한 생활을 영위하는 데 결코 게으르지 않았음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다.
제 7 절
주장 : 잠시 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과 칭의를 받고 구원의 믿음을 가진 사람과의 차이는 단지 그 기간에 있을 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13:20과 누가복음 8:13 등에서 이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즉 그 말씀은 잠시 동안 믿은 사람과 참 신자와의 차이가 세 가지 면에서 있는데, 첫째로 일시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돌 위에 떨어진 씨앗과 같으나 참 신자는 좋은 땅 위에 (마음 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으며, 둘째로 전자(前者)는 뿌리가 없으나 후자(後者)는 견고한 뿌리가 있으며, 셋째로 전자는 열매가 없으나 후자는 계속적인 인내를 가지고 많은 결실을 맺게 된다고 하셨다.
제 8 절
주장 : 은혜를 상실한 사람이 다시 새롭게 된다든지 또는 몇 번씩 새롭게 된다는 일은 불합리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씨, 즉 우리가 다시 새롭게 되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도 베드로의 말과 모순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제 9 절
주장 :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이 쓰러지지 않고 계속하여 믿음에 거해야 할 것을 그 어디에서고 기도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내가 너를(베드로)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2)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순되며, 또한 사도들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을 통하여 믿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도 기도하셨다고 하는 다음의 말씀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11,15,20).
결 론
도르트 신경은 벨기에 교회에서 논쟁되어 왔던 다섯 조항에 관한 정통 교리를 분명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선언한 것이며, 동시에 얼마 동안 말썽을 일으켰던 잘못된 주장을 지적하여 이를 배격한 것이다. 이 종교 회의에서 결정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동시에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 도르트 신조는 모든 진리와 공의와 은혜를 거스린 채 사람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말로 현혹시키려는 몇몇 사람들의 잘못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예정론과 여기에 첨가된 몇몇 요소들에 관한 개혁교회의 교리는 그 특징적인 경향에 비춰 볼 때 사람들에게서 모든 경건한 신자의 의무를 무시해 버리고 있으며, 이 세상적인 사단에 의해 조작된 일종의 마취제이다. 또한 이것은 사단의 견고한 요새이며, 여기에서 사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며 실망과 나태함의 화살로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며, 하나님을 죄와 불의의 원인으로 돌리며 또한 하나님을 폭군이요, 위선적인 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스토이즘, 마니교, 자유주의 및 이교사상을 수정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사람들을 육신적으로 있게 하는데, 왜냐하면 이 예정 교리는 그 어떤 것도 택함받은 자의 구원을 방해할 수 없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온갖 흉악한 범죄를 마음대로 자행하도록 유도되고 있다.
또한 이 교리는 유기된 사람들이 심지어 성자들이 모든 선행을 진실로 행한다 할지라도 그 행위는 그들이 구원 얻는 데 아무런 보탬이 되지를 못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선행이나 죄악과는 무관하게 그 분 마음대로 결정하시어서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징벌에 처하도록 내버려두시며, 더욱이 그들을 만드신 목적도 영원히 벌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이 교리는 가르치고 있으며 즉 선택이 신앙과 선행의 기초와 원인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정죄(유기)는 불신과 불경건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믿는 자들의 많은 자녀들은 그 모태로부터 죄 없이 태어났다가도 무자비하게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그 결과 세례나 세례 받을 때의 교회의 기도 등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이상과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 즉 개혁교회가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도르트 종교 회의에서는 개혁 교회의 모든 신앙을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판단해 주시되, 위에서 말한 잘못된 사람들의 중상모략으로부터가 아니요 또한 옛날이나 지금의 가르치는 자가 정직하지 못하게 인용했다든지 또는 전혀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곡해해서 인용하는 등의 사사로운 표현으로부터도 아니요, 교회들의 공적인 신앙고백, 즉 종교회의의 모든 교회가 다 같이 찬성하여 확정지음으로 정통교리로서 선포한 것에서부터 판단해 주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더 나아가 본 종교 회의에서는 개혁교회의 참 신앙고백을 중상모략하고 거짓 증거를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그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상하게 하고 진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본 종교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경건하게 살아갈 것을 권면하는 동시에 대학이나 교회 안에서 이 교리를 조심스럽게 가르칠 것을 바라는 바이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나 설교를 함에 있어서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경건한 생활을 이루며 고난당한 영혼을 위로하도록 해야 하며, 성경에 의한 믿음의 견지에서 사람들의 감정뿐만 아니라 그 언어까지 잘 규정하며, 성경의 참 의미를 가지고 인간이 알 수 있는 그 이상의 불필요한 한계를 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도록 하고, 거만한 마음으로 남을 공격한다는 구실로 또는 중상 모략하는 무례한 궤변론자들에게 개혁 교회의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성부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만민에게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진리 안에서 거룩케 하시며,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에게 참 진리를 주시며 건전한 가르침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시며, 그 진실한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지혜와 분별의 영을 내려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증거 하게 하며,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잘 인도하게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아멘.
[출처] 도르트 신조(1618)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도르트신조 강해 - 최찬영 목사
http://haninherald.com/xe/?mid=column2&search_target=title&search_keyword=1618&page=1&division=-8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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