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외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유사한 말을 사용하여서 더 뜻을 잘 드러내려고 할 때에 동의어를 쓴다.
즉 비슷한 말이지만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가진 다른 말을 사용하여서 더 말하고자 하는 것을 종합적으로 드러내려고
할 때에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와 용법을 가지고 있는 비슷한 말을 사용한다.
이렇게 사용되는 말을 동의어라고 한다. 형상과 모양은 이런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하여튼 하나님의 형상 혹은 모양이라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을 꼭 빼 닮았다는 뜻이다.
“인간이 무엇에 있어서 하나님을 꼭 빼 닮았다는 말인가?” 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칼빈은 신약에서 설명한 것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식과(하나님을 아는 지식)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의와 거룩함으로 이해했다.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벌코프라는 학자는 칼빈이 말한 것에다가 지(智), 정(情), 의(意)를 첨가하였다. 지, 정, 의란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 인격적인 요소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어거스틴도 비슷하게 기억, 지성, 사랑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칼빈은 타락 후에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무용지물이 되다시피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다.
벌코프는 칼빈이 말한 그런 면은 완전히 없어졌지만, 지, 정, 의는 타락 후에도 상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 정, 의를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 시켜서 이것들은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 역시도 기억, 지성, 사랑을 하나님의 흔적이라고 했으니 타락한 후에도 이런 것이
하나님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본 셈이다.
벌코프나 어거스틴은 인간 자질의 특별한 면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킨 셈이고
칼빈은 하나님과 관계해서 이해한 셈이다.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하나님과 관계해서 말할 수
있는 자질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관계된 이런 것들은 타락으로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용이하다.
결국 타락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 곧 인간 고유한 자질적인 면은
1)
거의 없어졌다는 쪽으로 나뉘게 된 셈이다.
2)
남아 있다는 쪽
자질이 거의 없다는 쪽에서
칼빈의 견해를 좀 더 특별하게 정리
자질 자체보다는 인간의 자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
즉 주어진 인간의 자질을 가지고 왕이신 하나님이 부여하신 직무 곧 세상을 다스리는 총리 노릇을 잘 하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정리하였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더 이상 총리 노릇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직무를 잃어버렸으니 하나님의 형상도 사라졌다고 말하게 된 셈.
자질이 남아 있다는 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반문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자질이 거의 없다는 쪽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고유한 자질이 아니고 직무에서 찾자고 한다.
자질이 남아 있다는 쪽에서 타락한 후에도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면서
창 5:1, 창 9:6, 약 3:9 를 근거로 든다.
말씀에 대해
자질이 거의 없다는 측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근거로 구속사역 범주 안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구속사(하나님의 계시를 이루어가시는 과정) 없이
인간자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창 5:1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관점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고 이해
창 9:6 무릇 사람이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 제물을 드린 후에 새 세상의 축복을 받은 후 하시는 말씀으로써
구속을 근거하는 말씀이라 생각
약 3:9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과거를 존중하고 있다고 말하고, 이 과거가 소망이 있는 것은 중보자를 통해서 있을 구속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남아 있지 않다는 쪽에서는
인간이 그의 자질적인 요소에 의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질적인 요소는 계속해서 타락한 쪽으로 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붙들어서 이끌어 주기 때문에 하나님께 붙잡혀 있다라고(유해무 '개혁교의학')말한다.
인간 자질은 하나님을 믿는 데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믿음의
유지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 자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정하면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하나님을 찾아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세미펠라기우스주의, 신인협동설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즉 천주교의 신학적 경향을 따를 위험성이 커진다.
플라톤, 공자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서 구원에 이른 사람들이다라고
생각될 수도 있기에
개혁주의에서는 이러한 경향성을 거부하여
인간의 고유자질을 하나님 형상에 포함시키는 것을 거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인 노력을 우리는 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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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현 목사님의 글 중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이 글을 통하여 후반부에는 박길현 목사님의 개인적인 이해와 평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개혁이란 것이 reformed 란 의미로 사도,선지자들의 가르침, 성경의 바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뜻인데 이것에 동조하지 않는 주의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1571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내세우며 개혁주의란 말이 쓰여지게 되었지만 사실 그 본래의 의미는 2세기 이레니우스가 영지주의를 반박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을 제시했었습니다.
즉 성경적인 것과 반 성경적인 것과의 대립과 충돌이 역사속에서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안에서도 해석과 의견이 불일치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큰 그림으로 볼 때 개혁신앙이 옳다고 여겨질지라도 마치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나는 진리의 편에 서 있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착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 할 수 없고 주님의 뜻을 완전하게 헤아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진전성에 의미를 두고 각자의 삶의 방편속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있고 이해 되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억지로 해석할 필요도 난해한 구절만 찾아서 공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말씀을 읽고 배우고 깨닫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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