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7일 월요일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전지하심

I. 서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인간이 스스로의 뜻에 따라 창조주의 뜻조차 거부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증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존중하시며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원하신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배치되는 개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로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하게 될 터이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인간이 어떻게 될 지는 그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므로, 하나님조차도 그의 미래를 알 수 없게 되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일어날 일을 이미 다 알고 계신가? 인간이 어떤 자유의지를 갖고 어떻게 행하든, 그가 어떻게 행할는지 알고 계시는가?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작정과 예정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어떻게 관계하는가?

 본 논문에서는 이에 대한 의문을 신학과 학부생의 입장으로서 풀어나가보려 한다. 우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개념과 한계를 명확히 하고(II장)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관련한 하나님의 예정(III장)에 대하여 서술한 후, 더불어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그분에게 있어서 시간의 개념(IV장)에 대하여도 논하려 한다. 그리고 결론에서 자유의지와 전지하심, 작정과 예정에 대하여 종합해보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II. 인간의 자유의지

 철학적인 면에서 자유의지는 결정론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인간 개개인이 조종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지배되고 희생당하며 모든 행동이 보이지 않는 어떤 인과법칙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결정론이라면, 자유의지는 행동이 그렇게 결정되지 않고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육체적 혹은 정신적 행동과정에서 둘 이상의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으며 또한 새로운 행동을 시작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의지의 힘을 구사하여 결정론적인 상황으로 보이는 환경을 개선-지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으로, 인간이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라는 개념이다1.

 이러한 견해를 신학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이 구원의 주체로서 나설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기에 따라 구원 여부가 결정되는데,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의 저술 <자유의지에 대하여 (Diatribe de livero arbitrio)>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인간이 그것에 의하여 자신을 영원한 구원에로나 또는 그 반대로 이끌 수 있는 것을 향하여 방향을 전환하는 힘”이다2.

 이와 같은 견해는 알미니우스주의 (Arminianism)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인간은 선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악을 떨침으로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3.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난점이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아담의 죄책으로부터 말미암아 나타난 원시적 오염 (Original Pollution)이다. 이것은 원시적 의가 박탈되고 죄에 대한 적극적 경향을 가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 오염은 전적 부패 (Total depravity)로 설명되며, 고유의 부패가 인간성의 모든 부분에 미쳐서 영적 선이 조금도 없으며 단지 도덕적 왜곡만 있음을 의미한다. 펠라기우스주의 (Pelagianism)와 소치니주의 (Socinianism), 그리고 초기 알미니우스주의에 의하여 부정되었으나 성경의 다음 항목에서 이를 가르친다4. (요 5:42; 롬 7:18, 23; 8:7; 고후 7:1; 엡 4:18; 딤후 3:2-4; 딛 1:15; 히 3:12)

 루터는 에라스무서에 반대하는 저술인 <노예의지에 대하여 (De servo arbitrio)>에서 인간에게는 그와 같은 자유의지는 없으며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면 오직 죄를 행할 자유만 있을 뿐이라고 답하였다. 또한 루터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한다. “선한 일들이 선한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악한 일들이 악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악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즉, 선한 공적이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자유로워진 사람이 그 삶의 결과로 선한 공적이나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5.

 개혁신학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오직 은혜 (Sola gratia)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사실로부터 근거한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모두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하였다6.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느냐, 아니면 자기의 통찰력의 지시에 따르느냐의 여부이다7.

 신학적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는 인간이 삶의 주체가 되어 선도 악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악을 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나 자율적으로 행동하려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느냐를 인간이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선악과를 따먹느냐 따먹지 않느냐, 하나님의 생명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지식으로 살아가려 하느냐-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느냐8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자유의지다.


III.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예정

 II장에서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의 측면에서 자유의지가 존재함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자유의지가 과연 하나님의 전지성과 충돌하지 않는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의 전지성에 대해, 뻘콥 (Louis Berkhof)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의 지식이란, 하나님께서 전혀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을 아시며, 따라서 가능한 그리고 현실적인 모든 것들을 아시는 완전성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 지식은 하나님 안에 고유하게 있는 것이요, 외부에서 섭취된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은 하나님의 의식에서 언제나 완전하며 명백하다. 그것은 총포괄적이기 때문에, 전지 (omniscience)라 불리워진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체를 아신다. 그는 모든 사물을, 과거, 현재, 미래를 걸쳐,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그대로 아시며, 또한 그것들을 그 참된 관계에서 아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감히 통찰할 수 없는 것들의 숨은 본질을 충분히 아신다. 현실적인 것도, 가능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음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은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의 전지를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왕상 8:39; 시 139:1-16; 사 46:10; 겔 11:5; 행 15:18; 요 21:17; 히 4:13. 9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지식을 완전하게 가지고 계시는데 이러한 지식은 자신의 영원한 계획의 시행과 관련되고,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전 포괄적이어서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적인 것까지도 모두 아신다10. 이 전지성으로 미루어볼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일어날 어떤 결과도 이미 알고 계심이 명백하다.

 또한 그 지식과 지혜로부터, 하나님께서는 그가 생각하셨던 목적을 달성키 위해 가장 좋은 수단을 선택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일체의 이차적인 목적으로 하여금 최종적인 목적에 공헌케 하시는데, 이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11.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하심으로 또한 이어진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미리 되어질 모든 것을 정하셨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할 모든 일들을 미리 정하시는 그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영원하신 목적이라 정의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12. 예정은 다음의 두 가지로 나뉘어 설명된다. 하나는 선택 (Election)이고 하나는 유기 (Reprobation)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창세 이전에 선택하시고 또한 구원받지 못할 자들은 그대로 유기하기로 결정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신 이유는 그분 자신의 결단 안에만 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롬 9:1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분을 믿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Sola gratia)에 의해서이며, 그것을 주시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창세 전부터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셨다면 인간에게 진정으로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을 유기하시고 있다고 답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치 않으시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 왕은 하나님의 능력을 모세로부터 열 번이나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 7:13)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전에 이미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출 4:21)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선했던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바꾸셨다고 보기보다는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놓아두셨다고 보는 편이 옳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의 마음에도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강퍅케 하시고 일부러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 아니하신다는 점은 명백하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13

 또한 이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전지함과 연결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하나님께서 예지하시기 때문에 예정하신다고 이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데, 펠라기우스주의 (Pelagianism) 혹은 반펠라기우스주의 (Semi-Pelagianism)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예정하셨기 때문에 예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지하셨기 때문에 예정하신다고 본다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구원받거나 혹은 구원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로 구원받기를 선택하거나 혹은 선택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예지하시므로 결과적으로 선택과 유기가 생기고 예정하심이 나타났다고 보는 시각이 생겨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주셔서 인간이 구원받았다고 보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구원을 선택할 수 있다 보게 된다14. 그러나 이미 II장에서 우리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스스로 구원을 선택할 능력조차도 없음을 확인하였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전지하심, 그리고 예정에 대해서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이 장차 타락할 것과 그를 통해서 그 후손이 멸망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그렇게 정해 놓으셨다.” 15 다만 이 예정론을 이해할 때 주의점은 칼뱅 (John Calvin)이 본디 이 예정론을 말한 것이 인본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신본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결과론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칼뱅에게 있어서, 인간의 이성이나 자유의지는 인간적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는 인 본위 신앙이므로 이를 철저히 배제하고 하나님의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철저한 신 본위 신앙을 주장한 것이다. 신자가 믿다가 타락하기까지는 선택된 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방법이 없고, 또 그가 탕아와 같이 다시금 주님께로 돌아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선택된 자의 규정을 정할 수 없고 신앙의 결과로서만 알 수 있다고 볼 때, 칼뱅의 조명론은 결과론에 근거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킨 남은 자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16. 중요한 것은 구원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며, 이 예정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용하며 하나님께서 그것들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시는 가운데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 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의 지식으로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음을 인정하여야 한다17. 칼빈은 예정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불가능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일들에 대하여 무지할 줄 아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 일들을 알려고 하는 열망은 일종의 광기다.” 18


IV. 하나님에게 있어서의 시간

 마지막으로 하나님에게 있어서의 시간과 전지성의 관계를 논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흘러가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심은 분명하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또한 하나님께서 장차 있을 일도 알고 계신다는 것도 분명한데19,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어떤 관련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논하기 전에 먼저 어거스틴 (Augustine)의 시간에 대한 관념을 언급하고자 한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아무것도 흘러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요, 만일 아무것도 흘러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며, 만일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시간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지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데 이 두가지 시간, 즉 과거와 미래가 어떻게 하여 있게 되는 것입니까? 반면에 현재라는 시간이 항상 현재로 남아 있어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현재가 -시간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과거로 지나가는 것으로만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현재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현재 시간의 존재 이유가 지나가 없어져 버리는 데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란 비존재로 흘러 지나가는 것으로만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20


 이러한 어거스틴의 통찰은 그 자체로 뛰어난 것이지만, 그보다 먼저, 시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사물의 변화는 창조를 지시하고 있다는 것과 모든 변화하는 것은 피조물이라는 것[246], 그리고 시간이란 변화와 함께 시작된 것이며 그것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는 것과[247], 따라서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란 없었다는 것을 말했다[248]. 그리고 그는 시간을 영원과의 대비 속에서 논의하고 있으며, 시간과 영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249]을 말한다21.

 영원이란 결코 비존재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도 미래도 없어야 한다. 비존재로 흘러가지 않는 참된 존재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고, 오직 현재만이 있는 그것을 어거스틴은 영원이라고 부른다. 이 점에서 영원은 무한한 시간적 지속이 아니라 시간을 넘어선 초시간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이시고 참된 존재이시다22.

 이와 같은 견지에서 생각해볼 때, 시간이 흘러감에 영향을 받는 것은 오로지 피조물뿐이다.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시간조차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신다. 그분에게 있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인간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분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현재 일어나는 일이며 동시에 영원하다. 시간의 흐름은 피조물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타락과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한 대속 - 그리고 인간이 은혜로 믿게 되어 구원받고 -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모든 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 그대로 영원이시며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존재이므로 당연히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창세 전에 우리를 계획하셨을 때에 이미 우리가 어떻게 타락하고 또한 구원받을 것을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도 알고 계신다. 영원이신 그분과 달리 영원하지 않은 피조물들이 ‘존재’하기 위한 요소로서 시간이 창조되었다.


V. 결론

 지금까지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충돌하지 않는가를 살펴보고, 또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더불어 하나님에게 있어 시간이란 어떠한 개념일까에 대해서도 논해보았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법칙 내에서 역사하시지만 또한 그 법칙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인간의 이해영역을 뛰어넘었다23.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한 노예로 만들지 않으시고,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주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인격체로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심과 동시에 인간의 구원을 예정하셨으며,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분명히 알고 계신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분명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렇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루어질’ 일이지만 그분께는 시간을 초월해 계셔 있으므로 현재에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시간조차도 우리를 위하여 배려되어진 선물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문헌

김영복, “마틴 루터의 기독인의 자유에 관한 분석적 고찰”, 한국대학선교학회, 대학과 선교 제 8집, 2005
명신홍, “인간의 전적 타락”, 신학지남사, 1970
안명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안명준, “칼빈의 인간론”
예영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한신대학교 출판부, 한신논문집 제 10권, 1993
임태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현대적 의미”, 한국신학연구소, 신학사상 제 138집, 2007
조익표,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 한신대학원, 1997
최종호, “예정론의 신학적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제 460호, 1997

Augustine,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선한용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
Louis Berkhof, 기독교 신학개론, 신복윤 역, 성광문화사, 1996
Wolfgang Sommer·Detlef Klahr, 교회사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백용기·홍지훈 공역, 한국신학연구소, 1998


──────────
예영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한신대학교 출판부, 한신논문집 제 10권, 1993, pp. 192-194. [본문으로]
Wolfgang Sommer·Detlef Klahr, 교회사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백용기·홍지훈 공역, 한국신학연구소, 1998, p. 175. [본문으로]
예영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한신대학교 출판부, 한신논문집 제 10권, 1993, pp. 196-197. [본문으로]
Louis Berkhof, 기독교 신학개론, 신복윤 역, 성광문화사, 1996, pp. 156-157. [본문으로]
김영복, “마틴 루터의 기독인의 자유에 관한 분석적 고찰”, 한국대학선교학회, 대학과 선교 제 8집, 2005, p. 253. [본문으로]
명신홍, “인간의 전적 타락”, 신학지남사, 1970, p. 7. [본문으로]
Louis Berkhof, Op. cit. p. 142. [본문으로]
임태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현대적 의미”, 한국신학연구소, 신학사상 제 138집, 2007, pp. 89-116. [본문으로]
Louis Berkhof, 기독교 신학개론, 신복윤 역, 성광문화사, 1996, pp. 75-76. [본문으로]
안명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본문으로]
Louis Berkhof, Op. cit. p. 76. [본문으로]
안명준, Op. cit. [본문으로]
최종호, “예정론의 신학적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제 460호, 1997, pp. 77-94. [본문으로]
때문에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예지예정을 배격한다. [본문으로]
최종호, “예정론의 신학적 이해”에 번역된 내용으로부터 인용함. 해당 논문의 주석에 의하면 출처는 Johannes Calvin, Institutio Christiane Relionis 1955, trans. by Otto Weber: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Neukirchen-Vluyn 1984 (Inst.로 약칭), III, 23, 7. [본문으로]
안명준, “칼빈의 인간론” [본문으로]
안명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본문으로]
Inst, III, 23, 8. [본문으로]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본문으로]
Augustine,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선한용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 pp. 395-396. [본문으로]
Ibid. pp. 379-394. [본문으로]
조익표, “화이트헤드의 시간이해”, 한신대학원, 1997. [본문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 내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을 피조물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것과 같다. [본문으로]
Categories: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

Subscribe to RSS Feed Follow me on Twitter!